한국사 / / 2023. 2. 7. 09:11

중일전쟁(1937.7.7~1945.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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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일전쟁은 이른바

노구교 사건으로 시작되었다. 
1937년 7월 7일 북경 서남 교외의

 노구교, 일명 마르코폴로 브릿지

 근처에서 몇 발의 총성이 울렸다. 


일본군은 근처에서 

야간연습을 하고 있었다. 
발포가 어느 쪽에서 이루어졌는지

 불분명했지만 일본은 이 총격을

 일본에 대한 중국의 도발행위로 

간주하고 즉각 보복공격을 퍼부었으며

 일본정부는 중국정부에게 사죄 및

 발포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다. 


만일 이 요구조건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대규모의 군대를 동원하겠다는

 협박까지 서슴지 않았다.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는

 이 조건을 들어줄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노구교 사건 이후 

몇 차례의 충돌이 있었지만 

현지에서는 정전협정이 체결되었다. 


그러나 일본은 내각회의를 열어 

이 사건을 중국이 계획적으로 

일본에 무력 대항한 것으로

 단정하고 전쟁 발표를 했다. 

일본 내의 군대들이 속속 중국에

 파견되었으며 8월 13일에는

 상해로 전쟁이 확대되었다. 


1937년 8월 15일 일본의 

고노에 내각은 '지나군(중국군)의 폭력을

 응징하여 남경정부의 반성을 촉구하기 위해

 지금 단호한 조치를 취할 때에 

이르렀다'고 발표하여 전면전을 선포했다. 
이른바 중일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중일 양국의 군대는

 치열한 전투를 계속했으며 

11월에 일본군은 국민정부의 수도이자

 중국의 중요거점인 남경을 

점령하기에 이른다. 

중일전쟁이 시작된 지 6개월여

만인 12월 13일이었다. 


국민정부가 떠나간 남경에는

 전쟁의 화를 피해 각지에서 모여든

 난민과 주민들이 무방비상태로

 남게 되었다. 


5만여 명의 일본군이 장악한 남경에서는

 이때부터 약 2개월 동안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잔인한 학살과 

강간 등 차마 입에 올리기조차

 끔찍스러운 온갖 잔학행위가 

일본군에 의해 자행되었다. 


일본인의 만행은 거기에 

가담했던 일본군인, 그것을 목격한

 일본인 종군기자, 외국인 기자들에

 의해 생생한 증언으로 밝혀졌다. 
그것은 차마 인간의 탈을

 쓰고는 할 수 없는

 잔혹한 짓이었다.

다음은 죽음 속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중국인의 증언이다.
"부두에 도착하자 날이 어두워졌다. 
일본군은 우리를 20명씩 한데 묶었다. 

묶고 나면 바로 기관총으로 쏴 갈겼다. 
나는 앞에 있어서 다른 사람을

 따라 강으로 뛰어들었다. 
총소리가 계속 귀를 때렸다. 
기관총 소리가 멈추고 일본군은 

한 사람씩 총검으로 찔렀다. 
죽지 않고 있던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총검질이 끝나자 시체들을 불로 태웠다."

〈아사히 신문〉의 한 기자는 

그가 목격했던 것을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부두에는 시커멓게 탄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일본군은 시체를 한 구씩 강물에

 내던지고 있었다. 
신음소리, 시뻘건 피, 경련하는 손발···."
"넓은 강 위엔 온통 시체였다. 
강변에도 시체가 높이 쌓여

 끝이 안 보였다. 
시체 중에는 군인은 물론 일반 백성,

 어린아이까지 있었다. 
시체는 강물을 따라 하류로 

흘러내려갔다."

수십 년이 지난 뒤 이 학살에

 가담했던 일본군인의 일기가 

우연히 발견되었는데, 그 일기에는

 '요즘 심심하던 중 중국인을 

죽이는 것으로 무료함을 달랬다. 
죄 없는 중국인들을 산 채로 매장하거나

 장작불에 밀어 넣어 몽둥이로 때리거나

 혹은 잔인한 방법으로 죽였다'라고 

쓰여져 있다. 

미국의 〈뉴욕 타임스〉 기자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남경 점령은 일본군에게 있어서

정치 ·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했다. 
그러나 이 군사적 승리는 

야만적 잔혹행위, 포로들의 대량학살, 

강탈, 강간 및 양민학살로 일본민족의

 명예에 오점을 남겼다.'

1946년 극동국제군사재판,

이른바 도쿄 재판 판결에 따르면,

이 때 살해된 사람만도 비전투원 1만 2천 명,

패잔병 2만 명, 포로 3만 명 등이고,

근교로 피난 간 시민 5만여 명 등

합계 13만여 명이 2개월 동안

살해되었다. 


그러나 이 숫자는 최소한의 것이고

 실제로는 30여만 명이 살해되었을

 것이라고 하는데 물론

 정확한 숫자는 아무도 모른다.

임어당이(중국의 유명한 작가) 쓴 

중일전쟁의 참사를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신이 인간을 창조한 이후

오늘에 이르러 처음으로,

병사들이 웃는 얼굴로 어린아이를

공중으로 던졌다가 떨어져 내려오면

날카로운 총검의 끝으로

받아내고는 그것을 스포츠라

부르는 모습을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또한 포로가 눈이 

가려진 상태로 참호 옆에서

 총검술 등과 같은 훈련의 

표적으로 사용되었다.'

일본군의 만행은 남경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점령한

곳은 어디에서든 계속되었다. 


일본 군부는 왜 이러한 만행을 유도, 

조장, 혹은 방치했을까? 
방치라고 하기에는

 2개월이라는 시간이 너무 길다. 
어떠한 경우라도 중국을 

확실히 정복하고야 말겠다는 

무언의 강력한 선언이었다고 

하기에는 너무 지나치며 어리석다. 
그 무자비한 폭력 앞에 

인간이 잠시 숨을 죽일 수는

 있을지언정 영원히 침묵할 수

 있겠는가?

일본군은 1938년 5월에는

 서주를 점령했으며 

10월에는 무한, 광주 등을 점령했다. 
남경의 국민당 정부는

 일본을 피해 무한으로 옮겼다가 

다시 중경으로 수도를 옮겼다. 


국민당 정부가 떠난 자리에 

남겨진 민중들은 자력으로

 항일 자위조직을 만들어 

일본군에 대항하게 되었다. 


팔로군은 이들을 지원하면서 

해방구를 키워나갔다. 
일본은 중국의 주요부분을 

점령하였으나, 실제로는 점과 선에 

불과했고 넓은 농촌은 항일유격대가

 통제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서남 지역으로

 후퇴한 국민정부 측에도 결정적인 

타격을 입히지 못한 채 

전선이 교착되었다.

짧은 시간 내에 전쟁을 승리로

마무리하려 했던 일본의

의도는 빗나갔다. 


남경대학살이라 이름 지어진

 일본인들이 던졌던 사상초유의 무리수는

 일본의 역사에 커다란 불명예로, 

인류의 역사에는 지울 수 없는

 의문점으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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