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 / 2023. 2. 10. 09:18

의열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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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단은

1919년 11월 김원봉의 주도 하에

만주 지린성에서 조직된

항일 무장 투쟁 단체였다.

의열단은 의로운 일을 맹렬히 행하는

단체의 약자로, 주로 일본 제국의 고위층에

대한 암살 활동이나 주요 시설에 대한

파괴 공작을 거행하였다.

 

이 단체를 발족한 약산 김원봉은

3.1 운동의 대중화 단계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독립 만세 시위를 전개한

조선인을 보고 크게 감동하였다.

 

이로써 의열 투쟁 결사대를 조직하여

암살ㆍ파괴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국내 동포들의 독립 정신을 환기시키고,

나아가 이를 통하여 국내외 한인을

중심으로 혁명을 촉발함으로써 민족의 독립과

조국의 광복을 달성하고자 하였다.

이 같은 구상 아래 김원봉은

1919년 11월 윤세주, 이성우, 곽경,

이종암 등의 동지들과 지린성에서

의열단을 발족하였다.

창단 당시의 단원은 신흥무관학교 출신이

중심이었다. 그리고 단장을 비롯해

김대지, 황상규가 고문을 맡았고,

단원은 김원봉, 윤세주, 이성우, 곽경,

강세우, 이종암, 한봉근, 한봉인, 김상윤,

신철휴, 배동선, 서상락, 권준의 13명이었다.

단장은 김원봉이 맡았다.

'이 13명은 광복 때까지 단 1명도

배신하지 않았다'는 표현으로 매우 유명하다.

한편 이 13명 중 단장 김원봉을 포함해

5명이 같은 밀양 동화중학교

출신으로, 서로 이웃사촌

관계였기도 하다.

비밀 결사 조직인 탓에 단원이

정확히 몇 명이었는지는 알기 어렵다.

의열단은 창단한 얼마 뒤에

 근거지를 지린에서 베이징으로 옮기고, 

상하이 지방에서 단원들을 포섭하여

 1924년경에는 약 70여 명의 단원을 이룰 수 있었다.

 

 후일 한국 민족 운동사에 이름을 남긴 

김구, 김규식, 김창숙, 신채호 등이 

실질적인 고문 역할을 했고, 

장제스 중국 국민당 총통의

 지원을 받기도 하였다.

 

1920년 3월부터 의열단은

곽재기, 이성우, 신철휴, 윤세주 등의

핵심 단원들을 행동대원으로

국내에 잠입시켰고,

조선총독부∙동양척식주식회사∙경성일보사를

폭파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마지막 실행단계에서

비밀이 누설되어 최초의 대규모

암살∙파괴 활동은 실패하고 말았다.


이에 굴하지 않고 의열단은

 1920년 9월 14일 박재혁을 파견하여

 부산경찰서를 폭파하고 서장을 암살했고, 

또 12월 27일에는 최수봉으로 하여금 

밀양경찰서를 폭파하게 하는 등

 연쇄적으로 일제 식민통치기관을

 공격하였다. 1921년 9월에는

 김익상이 조선총독부 청사

 폭파 의거를 성공시켰다.

그 외에도 1920년대에 

지속적으로 일본 고관 암살, 

관공서 폭파 등의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23년 김상옥, 24년 김지섭, 

26년 나석주 순).

 

1924년 김지섭이 도쿄 황궁에

폭탄을 던지는 일을 끝으로

김원봉과 같은 이들은

의열단이 이런 소규모 테러적인

항쟁이 아니라 쳬계적이고

다른 방향으로 재정립해야함을 느꼈고

그는 황푸군관학교에 가입하여

의열단의 세력이 위축되기 시작하였고

1927년 난창 봉기에 일부 의열단이

참여하자 이에 의열단내에서

마르크스주의자와 아나키스트,

좌파 민족주의자등이 여러 투쟁의

방향성은 물론 사상적관으로

많은 다툼을 겪었고 결국 의열단은

와해되었고 이후의 테러는 의열단의

체계적 조직을 통한 테러가

아닌 개별적인 투쟁으로 성격이

변하게 되었다.

이후 1928년 11월에 창립 9주년에

즈음하여라 의열단은 본격적으로 단체를

스스로 마르크스주의적으로 바꾸기 시작하였고

소련과의 동맹, 계급투쟁, 세계혁명적 단결,

독립적인 공산당의 창건등을 내세우자 

단체가 사실상 사라지게 되었고

스스로 해산을 선언하였다.

이후 김원봉과 윤세주는

중국에서 '조선공산당재건동맹'에

참여하고, '레닌주의정치학교'을

설립하였고, 1935년 민족혁명당 창당에

참여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김원봉은 장개석의 지원을 받아

조선의용대를 창설했고

군대 형태로 체재를 개편하게 된다.


의열단의 단장인 김원봉이

1926년 황포군관학교에서 저우언라이

등에게 직접 공산주의를 배운 이래

공산주의 활동을 해왔고,

1948년 월북하여 북한 정권 수립에

참여하고 6.25 때 훈장까지 받았다.

또한 북한에서도 결국 김일성에 의해

숙청당하면서 남북 모두에서 의열단에

대한 깊은 연구나 평가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최근에서야

남한에서 크게 주목받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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