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훙커우공원 투탄의거와
관련된 독립운동가. 의사(義士).
1918년 덕산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다음 해에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자극받아 식민지 노예교육을
배격하면서 학교를 자퇴하였다.
이어 최병대 문하에서
동생 윤성의와 한학을 공부했으며,
1921년 유학자인 성주록의 서당인
오치서숙에서 사서삼경 등 중국 고전을 익혔다.
1926년 서숙(일정한 곳에 자리를 잡고 삶)
생활을 마치고 농민계몽·농촌부흥운동·
독서회운동 등으로 농촌 부흥에
전력하였다.
다음 해 이를 더욱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농민독본』을 저술하고,
야학회를 조직해 향리의
불우한 청소년을 가르쳤다.
1929년 부흥원을 설립해
농촌부흥운동을 본격화했으며,
그 해 1월 초부터 1년간
기사일기(己巳日記)를 쓰기 시작하였다.
그 해 2월 18일 부흥원에서
학예회를 열어 촌극 「토끼와 여우」를
공연해 성황리에 마치게 되자
일제 당국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이에 구애받지 않고
지방 농민들을 규합해 자활적 농촌진흥을
위해 월진회를 조직, 회장에
추대되었다.
또, 수암체육회를 설치,
운영하면서 건실한 신체 바탕으로
독립정신을 고취하고자 하였다.
1930년 “장부가 집을 나가
살아서 돌아오지 않겠다.”라는
신념이 가득찬 편지를 남기고
채 3월 6일 만주로 망명하였다.
그러나 도중에 선천에서
미행하던 일본경찰에 발각되어
45일간 옥고를 치렀다.
그 뒤 만주로 탈출, 그 곳에서
김태식·한일진 등의 동지와 함께
독립운동을 준비하였다.
그 해 12월에 단신으로 다롄을 거쳐
중국 칭다오로 건너가 1931년 여름까지
현지를 살펴보면서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모색하였다.
이곳에서 세탁소의 직원으로
일하면서 모은 돈을 고향에
송금하기도 하였다.
1931년 8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있는 상해로 활동무대를 옮겨야
보다 큰일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
믿고 상해로 갔다.
상해, 안공근의 집 3층에
숙소를 정하였다.
우선 생계를 위해
동포 실업가 박진이 경영하는
공장의 직공으로 일하면서
상해영어학교에서 공부하였다.
그러면서 노동조합을 조직해
새로운 활동을 모색하였다.
그 해 겨울에 임시정부의
김구를 찾아가 독립운동에 신명을
바칠 각오임을 호소하였다.
1932년 한인애국단의
이봉창이 1월 8일 동경에서 일본왕을
폭살하려다가 실패하자
상해 일대는 복잡한 상황에 빠졌다.
더욱이 일제는 1월 28일
고의로 죽인 일본승려사건을
계기로 상해사변을 도발하였다.
이때 일본은 시라카와 대장을
사령관으로 삼아 중국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윤봉길은 이 해 봄
야채상으로 가장해서
일본군의 정보를 탐지하였다.
4월 26일 한인애국단에
입단해 김구의 주관 하에
이동녕·이시영·조소앙 등의 협의와 동의
아래 4월 29일 이른바 천장절 겸
전승축하기념식에 폭탄을
투척하기로 하였다.
식장에 참석해 왕웅(중국군
현역 군인 신분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김구를 도와 윤봉길,
이봉창의 거사를 지원)이
만들어 폭발시험까지 했던
수류탄을 투척하였다.
이때 상해 파견군사령관 시라카와,
상해의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다 등은
즉사하고, 제3함대사령관 노무라 중장,
제9사단장 우에다 중장, 주중공사 시게미쓰
등이 중상을 입었다.
거사 직후 현장에서
잡혀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 해 11월 18일 일본으로
호송되어 20일 오사카 위수형무소에
수감, 가나자와에서 12월 19일
총살형으로 순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