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 / 2023. 1. 26. 09:22

명성황후(1851 ~ 18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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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말기 제26대 왕 고종의 비로

고종의 황제 즉위 이후

명성황후라 칭해졌다.

성은 민씨이며, 1851년(철종 2)

경기도 여주에서 영의정에 추증된

치록의 딸로 태어났다.

8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가난하게 살았으나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주변에 알려졌다.

 

16세에 흥선대원군의

부인 부대부인 민씨의 추천으로

고종 비 에 간택되었다.

그러나 고종은 궁인 이씨로부터

완화군을 얻고 비를 돌보지 않았으나

비는 예의범절이 밝아 칭송을 받았다.

 

완화군이 태어나자

대원군은 이를 기뻐하였고

비는 이에 분개하여 불만을 가졌고

대립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후에 원자가 태어났으나

5일 만에 요절하자

그 원인을 가지고 대원군과 더욱

대립하였다. 비는 대원군의

반대파인 민승호, 대원군의 형 이최응,

그 아들 재면, 조대비의 조카 조성하,

대원군의 반대 세력인 김병국,

조두순, 이유원 등을 규합하여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였다.

마침 1873년 일본에서 

대두된 정한론으로 

내외정세가 불안해지고,

 경복궁 중건으로 민생고가 

가중되는 등의 이유로 

대원군에 대한 민심이 나빠지자 

이를 이용하여 유림의 거두 최익현을

 동부승지로 발탁하고, 대원군의 

실정과 정책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게 하여 결국 10년간의 권좌에서

 물러나게 하였다(1873). 

 

고종에게 친정을 선포하게 함과 

동시에 비 중심의 세력으로

 정권을 구축한 뒤, 개방정책을

 펴서 일본과 수교하였다(1876).


대원군과의 대립이 심화된 가운데, 

1882년 임오군란이 발발하여

 민씨 세력이 위협을 당하자

 비는 궁궐을 탈출, 화개동 윤태준의 집을

 거쳐 충주·장호원으로

 옮겨 다니며 피신하였다. 

국내가 혼란해지자 고종은

 대원군의 힘을 빌렸고, 

비가 오랫동안 사라지고 

나타나지 않자 흥선대원군이 

중전의 국상을 선포하려 하였다. 

 

이때 윤태준을 고종에게 밀파하여 

자신의 건재를 알리고

 청나라에 지원을 요청하게 하였다. 

청나라 군대의 출동으로 

군란이 진압되고 대원군은 

청으로 압송되는 수모를 당했고,

 민씨 중심의 정권이 다시 수립되었다.


1884년 김옥균·박영효 등

 급진개화파가 갑신정변을 일으키자,

 심상훈 등을 통하여 청군이 개입하도록

 함으로써 3일 만에 개화당 정권을

 무너뜨렸다. 점차 정권을 좌우하고, 

흥선대원군에의 복수심을 키우고

 궁궐에서 굿을 하거나 치성 명분으로

 명산대천을 찾아다니며 

국고를 낭비하기도 하였다.  


일본 세력의 침투가 점차 강화되면서 

김홍집 등 친일 내각이 득세하고,

 1894년 7월 일본 세력을 등에 업은

 흥선대원군이 재등장하면서

 갑오개혁이 시작되자, 이번에는

 러시아에 접근하여 일본 세력을 

추방하려고 하였다. 이에 일본 정부의

 사주를 받은 주한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가

 1895년 8월 20일(양력 10월 8일) 

일본 낭인들을 궁중에 잠입시켜 

명성황후를 살해하였다.

일본 낭인들은 그녀의 시신을

궁궐 밖으로 옮겨 소각하였다

 

그 뒤 폐위되어 서인으로

강등되었다가, 같은 해 10월 복호되었고,

1897년(광무 1) 명성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그 해 11월 국장으로

청량리 밖 홍릉에 안장되었다.

고종의 황제 즉위를 계기로

명성황후라 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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