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의 민족운동 지도자이자
인도 건국의 아버지.
남아프리카에서의 인종차별에
대한 투쟁으로 유명해졌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에 대해
반영·비협력 운동 등의 비폭력
저항을 전개하였다.
인도 서부 포르반다르에서
부잣집 막내아들로 태어난 간디
간디의 집안은 상인계급에 속했고
식료품상이었다.
조용하고 수줍음 많은 소년
간디는 고등 학교를 졸업한 뒤
영국으로 건너가 법률을
공부해 변호사가 되었다.
간디는 46세에 고국으로 돌아와
인도 독립을 위해 본격적으로
투쟁에 들어간다.
감옥을 드나들면서 간디가 벌인
투쟁은 무저항 운동이었다.
그리고 단식 투쟁을 하면서
영국에 저항하고 인도 국민을 하나로 묶었다.
1919년, 영국은 인도를 억압하기 위해
영국에 항거하는 사람은 재판 없이
처형할 수 있다는 법을 만들었다.
그러자 간디는 새로운 방법으로 대항했다.
비폭력 저항 운동을 벌여
영국인이 가르치는 학교에도 다니지 말고
영국 물건도 쓰지 말자고 했다.
간디는 또한 비협조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영국의 요구를 무시하고 영국 재판소에
가지 않도록 인도 사람끼리 타협하고
양보하기로 하며, 마치 영국 사람들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자고 했다.
아무리 영국이 인도 사람들을 억지로
잡아가도 인도 사람들은 반항하지 않았다.
이렇듯 인도 사람들이 철저하게
비폭력주의에 따르자
영국 정부는 감옥에 갇힌 인도 사람들을
풀어 주고 세금을 크게
올리려 했던 것도 포기했다.
그리고 영국에 대항하는
인도 사람들을 바로 감옥에 넣을 수
있는 ‘롤라트 법’도 폐지했다.
하지만 1930년에 ‘소금법’을 만들어
모든 소금을 영국에서 수입해 쓰라고 했다.
그러자 간디는 직접 소금을 만들기로 했다.
소금이 나는 해안으로 소금 행진을 떠났고
많은 제자들이 간디의 뒤를 이었다.
이 일로 간디는 체포되었다.
간디가 감옥에 들어간 것을
안 인도 사람들은 영국인 소금 공장으로 달려갔다.
그 곳에서 유혈 사태가 발생하였고
그 일은 곧 세계로 알려졌다.
감옥에서도 간디는 불복종 운동을
멈추지 않았다.
책도 쓰고 신문 기사도 썼으며
단식도 했다.
영국은 간디가 감옥에서 죽었다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간디를 석방했다.
그리고 마침내 1947년 인도는
영국의 식민지 통치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인도는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대립으로
인도 연방과 파키스탄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간디는 이를 막기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 힌두교 신자에게 목숨을 잃고 말았다.
인도 독립의 아버지라 불리는
간디는 오늘날 위대한 넋이라는
뜻의 ‘마하트마’라고 불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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