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공화정
기원전 6세기 로마 전반기에 로마인이 왕을 추방하고 공화정을 수립하였다.
로마 공화정을 움직인 정치 기구는 군대를 지휘하거나 행정을 담당하는 집정관,
외교와 재정 문제 및 집정관에 대한 자문을 담당하는 원로원,
그리고 관리 선출과 입법, 재판 및 국가 주요 정책 등을 결정하는 민회이다.
통령(집정관)은 2명이었고 임기는 1년이었으며 행정과 군대를 관할하였다.
원로원은 300명의 귀족으로 구성된 체제로 권력의 중심 역할을 담당하였다.
평민회는 민주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으며 재판을 담당하였고 호민관을 선출하였다.
귀족 정치의 색채가 강하였고 평민은 참정권이 인정되지 않아 귀족과 오랫동안 대립하였다.
제1 · 2차 삼두 정치를 거쳐 기원전 27년 아우구스투스가 사실상의 제정을 실시함으로써 공화정은 끝이 났다.
공화정이 무너지다
로마가 지중해를 차지하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은 바로 농민이었다.
로마에서는 농민이 중장보병이기도 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왔을 때, 농민들은 오히려 가장 큰 피해자가 되고 말았다.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은 농민들이 많았고, 그나마 가까스로 살아 돌아온 농민들을 반겨 준 것은 오랫동안 농사를 짓지 못해 황폐해진 땅밖에 없었다.
어렵게 농사를 지어도 전쟁 후, 정복지와 속주에서 값싼 농산물이 밀려 들어와 제값에 팔 수도 없었다.
결국 농민들은 땅을 포기하고, 부자들에게 헐값에 팔아 버렸다.
농민들은 가난에 허덕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로마의 귀족과 지배층은 정복한 지역에서 들어오는 세금으로 인해 더 큰 부자가 되었다.
그 돈으로 농민들의 땅을 헐값에 사들였다.
부자들은 큰 농장을 운영하며 돈을 더욱 많이 벌었다.
더구나 정복지나 속주에서 사들인 노예들이 농사를 지어 주었기 때문에 작물을 값싸게 키워 낼 수 있었다.
중소 농민은 이 큰 농장과 겨룰 수 없었고, 더욱 빠르게 몰락했다.
농민이 몰락하자, 로마의 군사력은 점점 약해져 갔다.
로마 군은 토지를 가진 농민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들이 토지를 잃고 빈털터리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까딱하다가는 중소 농민들이 떠받치고 있는 공화정이 무너질 수도 있었다.
“이러다가 로마가 무너질지도 몰라. 토지 제도를 개혁해야겠어.”
이즈음 호민관이었던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토지를 소유할 수 있는 기준을 정하여 발표했다.
그러면 농민들이 먹고사는 데 지장이 없을 터였다.
"대토지 소유를 제한한다.
귀족이나 유력자의 토지를 몰수하여 농민들에게 재분배 한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두 형제의 개혁을 반대하던 원로원과 큰 땅을 가진 귀족이 일어나 티베리우스를 암살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티베리우스의 동생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형이 만들어 놓은 토지 개혁안을 추진했다.
그리고 로마 시민들에게 싼값에 곡물을 공급하는 법안도 내놓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가이우스의 개혁 역시 실현되지 못했다.
이후 로마는 한동안 혼란에 빠졌다.
북방에서 게르만 족이 쳐들어와 전쟁을 벌였고, 시민권을 요구하는 로마의 동맹시들과도 싸워야 했다.
그러는 동안 귀족들이 용병을 모아 힘을 키우고 세력을 넓혀 각각 귀족파와 평민파를 이끌었다.
서로 권력을 잡기 위해 치열하게 다투었다.
이제 원로원 중심의 공화정은 무너진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평민파의 우두머리였던 카이사르가 집정관이 되어 같은 평민파 장군이었던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를 끌어들인 뒤, 원로원을 억누르고 권력을 차지해 버렸으니말이다.
이를 삼두 정치라 부른다.
로마가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나타났던 정치 형태이다.
원래는 고대 로마의 관직인 ‘3인 위원’을 가리켰으나, 뒤에 세 명의 정계 유력자가 결탁하여 정권을 독점하는 것을 일컫는다.
B.C. 60년에 폼페이우스, 카이사르, 크라수스 세 사람이 파벌을 중심으로 하는 원로원에 대항하여 정치상 서로 이해에 반하는 일을 하지 않을 것을 밀약하고 제1차 삼두 정치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크라수스의 전사 뒤 해체되었으며,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의 세력 다툼에서 카이사르가 승리하여 독재 정권을 수립하였다.
B.C. 44년 카이사르가 암살당한 뒤, 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 레피두스 세 사람이 B.C. 43년에 ‘국가 재건을 위한 3인 위원’으로 임명되면서 제2차 삼두 정치가 시작되었다.
이 세 명의 지위는 B.C. 37년에 다시 5년 연장되었으나 B.C. 36년 레피두스가 탈락되어 해체되었다.
그 뒤 B.C. 31년에 옥타비아누스가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에게 승리함으로써 공화정은 무너지고 제정이 수립되었다.
로마를 움직인 또 다른 사람, 노예
로마의 노예 대부분은 전쟁에 진 다른 민족의 포로였다.
특히 포에니 전쟁 이후 로마가 정복지를 늘리면서 노예의 수가 급격하게 늘어났다.
남자 노예는 농사를 짓거나, 광산에서 광물을 캐고, 군용선의 노를 젓는 일에 내몰렸다.
검투사가 되어 사자와 같은 맹수와 싸우다가 죽는 사람도 많았다.
여자 노예는 귀족의 요리사나 하녀, 유모가 되어 잡일을 했다.
역사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1세기 말쯤 이탈리아에는 약 200만~300만 명의 노예가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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