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 / / 2022. 3. 30. 10:51

고대로마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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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반도에 ‘로마’라는 작은 도시 국가가 세워졌다.

기원전 753년경, 그리스에서는 도시 국가인 폴리스들이 4년에 한 번씩 모여 올림피아 제전을 펼치고 있었다.
이때 그리스 서쪽 바다 건너, 장화 모양의 이탈리아 반도에 ‘로마’라는 작은 도시 국가가 세워졌다.
로마의 왕은 군대를 이끄는 일부터 재판과 제사를 올리는 일까지 도맡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기원전 6세기 무렵, 로마의 귀족과 평민이 나서서 왕을 추방했다.
로마는 시민의 뜻을 따르는 정치 제도인 공화정을 만들었다.
왕이 아니라 민회에서 나랏일을 의논하고, 원로원이 결정하였다. 
그리고 1년에 한 번 집정관 두 명을 뽑아 군대를 이끌고, 정치를 하도록 맡겼다.
하지만 나라의 중심 기관인 원로원과 행정의 최고 책임자인 집정관이 모두 귀족이었다. 
평민의 의견은 힘이 없었고, 높은 자리에 오르지도 못했다.
이 당시 로마는 주변의 다른 민족과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평민들은 농사도 못 짓고 전쟁에 군인으로 나가야 했다. 
평민들은 먹고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귀족에게 빚을 졌다. 
그러다 보니 점점 귀족에게 불만을 갖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부유한 평민들도 관직에 진출하고 싶어 했다.
기원전 494년, 마침내 평민들은 로마 부근의 언덕 위에 모여 시위를 벌였다. 
귀족은 이들의 요구를 무시할 수가 없었다. 
나라를 이끌어 가기 위해서는 귀족보다 그 수가 훨씬 많은 평민의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귀족만 알던 법을 평민도 알 수 있도록 금속판에 새겨서 공개하기도 했다. 
거기에는 12 표법이 담겨 있었다. 
12 표법은 로마 최초로 문자로 적어 발표한 성문법이었다.
기원전 367년에는 평민 중에서도 집정관이 나올 수 있도록 하는 리키니우스 법이 만들어졌고, 
다시 기원전 287년에는 원로원의 허락 없이도 평민 회의 결정이 힘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호르텐시우스 법까지 만들어졌다.
이렇게 로마의 공화정이 완성되어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명문 귀족 출신의 원로원이 여전히 막강한 힘을 발휘했다.
공화정 체제가 뿌리를 내리는 동안, 로마는 한편으로 오랜 적이었던 에트루리아를 공격해 완전히 점령했다. 
그리고 이탈리아 반도의 남동쪽에 살던 삼니움 족을 공격해 굴복시켰다.
남쪽 이탈리아에 있던 그리스 식민 도시 타렌툼과도 싸워 이겼고, 
동시에 여러 그리스 식민 도시를 정복했다.
그럼으로써 로마는 북쪽 일부를 제외한 이탈리아 반도를 한 손에 거머쥐게 되었다.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자, 로마의 눈에 남쪽의 지중해 바다가 쏙 들어왔다.
그즈음 지중해에서는 카르타고가 해상 무역을 주름잡으며 재산을 엄청나게 긁어모으고 있었다. 
로마 사람들은 카르타고 사람들을 ‘페니키아 사람’이란 뜻으로 ‘포에니’라고 불렀다.
그런데 기원전 289년쯤 시칠리아 섬에 있는 그리스의 식민 도시 시라쿠사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반란을 일으킨 주인공은 다른 나라에서 돈을 벌러 온 군인인 용병들이었다. 
이들은 매우 포악하게 시민들을 학살하는 등 만행을 저질렀다.
그러자 시라쿠사의 왕은 즉시 군대를 보내 이들을 무찔렀다. 
궁지에 몰린 용병들은 급히 로마에 도와달라고 했다.
로마는 용병들을 돕기로 했다.
카르타고 역시 이를 핑계로 시칠리아 전부를 차지할 욕심을 가졌다. 

마침내 두 나라는 전쟁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1차 포에니 전쟁이 일어났다.
전쟁은 시칠리아 섬과 그 주변의 바다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막강한 해군력을 가진 카르타고에 크게 유리했다. 
하지만 로마는 싸움을 길게 끌지 않고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연구했다.
카르타고 군함에 쇠갈고리를 던져 우리 쪽으로 끌어당겨 배가 가까이 다가오면 병사들이 뛰어들어 공격하는 전술이었다.
로마가 쓴 전술은 아주 효과적이었다.
군사들끼리 부딪쳐 싸우는 데에는 로마 군을 상대할 병사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로마의 시민들이 직집 재산을 털어 배를 만들어 주었다.
마침내 싸움은 로마의 승리로 끝났다.
그럼으로써 로마는 서지중해를 마음껏 드나들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로마는 해마다 카르타고로부터 전쟁 피해 배상금을 어마어마하게 받을 수가 있었다.
전략이 뛰어난 명장, 한니발은 카르타고의 젊은 장군이다. 
그는 2차 포에니 전쟁을 일으켰다.
복수를 노리던 카르타고는, 약해진 국력을 보충하기 위해서 히스 파니아(지금의 이베리아 반도)를 식민지로 만들었고 다시 로마를 노렸다.
스물여섯 살의 한니발은 히스파니아의 총독이 된 뒤 착실하게 준비를 마치고 출정을 서둘렀다.
걸어가는 군사 4만 명, 말을 탄 군사 6천 명, 또 코끼리 60여 마리가 로마로 향했다.
이렇게 2차 포에니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한니발은 바닷길이 아닌 알프스 산맥을 넘기로 했다.
산을 넘는 동안, 군사들 중 절반이 추위를 견디지 못해 달아나거나 목숨을 잃었지만 한니발의 군대는 마침내 로마에 다다랐다.
로마 군은 온 힘을 다해 한니발을 막았지만, 계속하여 패배했다.
로마의 시민들은 겁에 질렸다.
곧 로마가 불바다가 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한니발은 로마의 동맹시를 완전히 없애기 위해서 로마로 향하던 진군을 늦추었다.
이 기회를 틈타 로마의 스키피오 장군은 3만 5천 명의 군대를 이끌고 카르타고 본국을 공격했다. 
뜻밖의 역습에 깜짝 놀란 한니발은 서둘러 본국으로 돌아왔다.

양쪽의 군대는 양보 없는 싸움을 벌였고, 이 전투에서는 한니발이 패하고 말았다.
이 싸움에서 지는 바람에 카르타고는 막대한 배상금을 내야 했다.
게다가 군대마저 함부로 움직일 수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이때를 틈타 카르타고 서쪽에 있던 누미디아 왕국이 침략을 거듭했다.
카르타고는 로마에 누미디아 왕국을 물리칠 수 있게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카르타고는 로마의 허락 없이 군대를 동원해 누미디아와 싸웠다.
그러나 이것을 지켜보던 로마는 카르타고가 약속을 어겼다며, 큰 군대를 보내 다시 카르타고를 공격했다.
바로 3차 포에니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로마 군은 성을 포위하고 맹렬하게 카르타고를 공격했다.
카르타고 사람들은 성 안으로 들어가 3년간 버티며 싸웠다.
3년에 걸친 포위 공격으로 카르타고 사람들은 굶주림에 시달렸고, 지쳐 있었다.
때를 기다리던 로마 군은 카르타고의 성을 갑자기 습격하여 불태워 버렸다.
로마 군 사령관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의 명령에 카르타고는 불타올랐고, 
항복한 카르타고 사람들은 모두 노예로 끌려갔다. 
카르타고는 처참하게 멸망하고 말았다.
로마는 이 여세를 몰아 그리스를 비롯해 동지중해의 많은 나라들을 정복했다. 
그리고 마침내 지중해를 완전히 손안에 넣게 되었다.
로마가 지중해를 차지하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은 바로 농민이었다.
로마에서는 농민이 중장보병이기도 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왔을 때, 농민들은 오히려 가장 큰 피해자가 되고 말았다.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은 농민들이 많았고, 그나마 가까스로 살아 돌아온 농민들을 반겨 준 것은 

오랫동안 농사를 짓지 못해 황폐해진 땅밖에 없었다.
어렵게 농사를 지어도 전쟁 후, 정복지와 속주에서 값싼 농산물이 밀려 들어와 제값에 팔 수도 없었다.
결국 농민들은 땅을 포기하고, 부자들에게 헐값에 팔아 버렸다.
농민들은 가난에 허덕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로마의 귀족과 지배층은 정복한 지역에서 들어오는 세금으로 인해 더 큰 부자가 되었다.
그 돈으로 농민들의 땅을 헐값에 사들였다.
부자들은 큰 농장을 운영하며 돈을 더욱 많이 벌었다.
더구나 정복지나 속주에서 사들인 노예들이 농사를 지어 주었기 때문에 작물을 값싸게 키워 낼 수 있었다.
중소 농민은 이 큰 농장과 겨룰 수 없었고, 더욱 빠르게 몰락했다.
농민이 몰락하자, 로마의 군사력은 점점 약해져 갔다.
로마 군은 토지를 가진 농민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들이 토지를 잃고 빈털터리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까딱하다가는 중소 농민들이 떠받치고 있는 공화정이 무너질 수도 있었다.
이즈음 호민관이었던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토지를 소유할 수 있는 기준을 정하여 발표했다.
토지개혁이었다.
그러면 농민들이 먹고사는 데 지장이 없을 터였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두 형제의 개혁을 반대하던 원로원과 큰 땅을 가진 귀족이 일어나 티베리우스를 암살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티베리우스의 동생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형이 만들어 놓은 토지 개혁안을 추진했다.
그리고 로마 시민들에게 싼값에 곡물을 공급하는 법안도 내놓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가이우스의 개혁 역시 실현되지 못했다.
이후 로마는 한동안 혼란에 빠졌다.
북방에서 게르만 족이 쳐들어와 전쟁을 벌였고, 시민권을 요구하는 로마의 동맹 시들과도 싸워야 했다.
그러는 동안 귀족들이 용병을 모아 힘을 키우고 세력을 넓혀 각각 귀족파와 평민파를 이끌었다.
서로 권력을 잡기 위해 치열하게 다투었다.
이제 원로원 중심의 공화정은 무너진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평민파의 우두머리였던 카이사르가 집정관이 되어 같은 평민파 장군이었던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를 끌어들인 뒤, 원로원을 억누르고 권력을 차지해 버렸다
이를 삼두 정치라 부른다.

집정관의 임기가 끝난 뒤, 카이사르는 갈리아의 총독이 되었다.
카이사르는 굳게 결심을 하고 병사들을 이끌었다.
앞장서서 갈리아 사람들과 싸웠다.
뿐만 아니라 라인 강을 넘어 쳐들어오는 게르만 사람까지 몰아냈다.
연거푸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카이사르는 그마저도 완벽하게 억누르고 갈리아 지역을 완전히 로마의 것으로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카이사르는 돈을 많이 모았다.
하지만 그 돈을 혼자 차지하지는 않았다.
부하들에게도 일일이 나누어 주어서, 부하들이 카이사르를 더 믿고 따랐다.
카이사르의 인기는 점점 더 높아졌고, 카이사르의 인품은 로마 사람들에게도 알려졌다.
그러던 기원전 53년 삼두 정치를 함께 이끌던 크라수스가 원정을 떠났다가 살해되고 말았다.
삼두 정치의 한 축이 무너지자, 원로원은 폼페이우스와 짜고 카이사르를 총독 자리에서 물러나게 했다.
갈리아에 있다가 이 사실을 알게 된 카이사르는 어쩔 수 없이 폼페이우스와 정면 대결을 하기로 결심했다.

카이사르는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향했다.
“아아! 주사위는 던져졌도다.”
카이사르는 갈리아와 로마의 경계인 루비콘 강을 건너며 외쳤다.
군대를 이끌고 루비콘 강을 건너는 것은 불법행위였다.
기원전 49년 1월 10일, 로마는 혼란에 빠졌다.
겁먹은 시민들은 급히 로마를 빠져나갔고, 폼페이우스 역시 로마를 탈출해 그리스로 도망쳤다.
결국 카이사르가 로마에 들이닥쳤을 때 로마는 텅 비어 있었다.
카이사르는 곧 시민들을 안심시키고 폼페이우스를 뒤쫓았다.
이때, 폼페이우스는 여러 정복지에서 군대를 얻어 카이사르와의 일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마침내 양쪽 군대는 그리스 북부의 도시, 파르살루스에서 맞붙었다.
병사의 수는 폼페이우스 쪽이 많았지만, 전투 경험이 많은 카이사르 쪽이 승리를 거두었다.
폼페이우스는 이번에는 이집트로 달아나 프톨레마이오스 13세에게 보호를 요청했다.
고대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최후의 여왕이다. 
프톨레마이오스 13세에게 왕위를 빼앗겼다가 카이사르의 도움으로 왕위를 회복하였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폼페이우스를 보호해 주면 틀림없이 카이사르가 날 가만두지 않을 거란 생각을 했다.
결국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폼페이우스의 목을 베어 카이사르에게 넘겨주었다.
그러자 카이사르는 자신의 오랜 정치적 동지였던 폼페이우스의 죽음을 슬퍼하며 프톨레마이오스 13세를 감옥에 가두어 버렸다.
그리고 다시 클레오파트라가 왕위를 잇게 하였다.
이어 카이사르는 서아시아와 아프리카 등에서 일어난 반란을 억누르고 기원전 46년 10월 로마로 돌아왔다.
카이사르는 곧 임기 10년의 독재관에 임명되었다.
더 이상 로마에서는 카이사르에게 맞설 자가 없었다.
그러니 카이사르는 왕이나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왕이라는 호칭을 쓰지 않았다.
오히려 시민들의 눈을 의식해 문화와 예술을 지원하였고, 
가난한 사람들을 카르타고 같은 로마 속주에 이주시켜 새롭게 살아가도록 도왔다.
그러나 공화정의 전통을 지키려는 사람들은 카이사르 암살을 몰래 계획했다.
그들은 카이사르가 아끼는 정치가 브루투스를 끌어들였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 원로원 모임에 참석했던 카이사르는 브루투스의 칼을 맞고 쓰러졌다.
“브루투스, 너마저도······.”
카이사르는 이 짧은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카이사르가 세상을 떠난 뒤, 그의 부하였던 안토니우스는 브루투스와 암살자들을 모두 소탕했다.
덕분에 안토니우스의 인기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안토니우스는 오히려 카이사르의 상속자였던 옥타비아누스보다 더 큰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곧 뒤바뀌고 말았다.
안토니우스는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의 미모에 빠져 자신의 본분마저 잊었다.
싸움터에 클레오파트라를 데려가는 등 지나친 행동을 계속했고, 로마에 돌아오지 않고 이집트에 머물렀다.
로마 시민들은 안토니우스를 원망했다.
이에 옥타비아누스는 시민들의 지지를 얻어 이집트를 공격하겠다고 발표했다.
기원전 31년 9월 1일, 그리스 서북쪽 악티움곶 앞바다에서 옥타비아누스의 로마 해군은 클레오파트라의 이집트 함대와 만났다.
물론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를 돕고 있었다.
처음엔 양쪽의 싸움이 아주 팽팽했다.
안토니우스의 함대가 워낙 막강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싸움이 옥타비아누스에게 유리해지자, 클레오파트라가 이끄는 이집트 함대가  싸움에 질 것 같아서 싸움터를 벗어나 후퇴했다.
그것을 본 안토니우스 역시 싸움을 포기하고 그 뒤를 따라 달아났다.
얼떨결에 남겨진 안토니우스의 군사들은 지휘관도 없이 싸워야 했고, 
당연히 싸움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안토니우스의 함대는 옥타비아누스 함대의 공격에 전멸하다시피 했다.
클레오파트라는 옥타비아누스로부터 안토니우스를 없애 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를 속여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옥타비아누스가 클레오파트라를 로마에 포로로 끌고 갈 거라는 소식에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의 뒤를 따라 세상을 떠났다.
이어 이집트가 함락되었고, 로마는 지중해를 완전히 통일하고 평화 시대를 맞았다.
옥타비아누스가 로마에 위풍당당하게 돌아오자, 원로원과 시민들은 옥타비아누스의 이름을 원로원 위원 명단 첫머리에 넣어 주었다.
옥타비아누스에게 ‘존엄한 자’, 즉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바친다.
그럼으로써 옥타비아누스가 로마 제국 최초의 황제가 된 거나 다름없었다.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의 일인자로서 로마를 지배해 나갔다.
하지만 아무도 옥타비아누스를 독재자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옥타비아누스는 철저하게 원로원의 권위를 존중해 주었고, 모든 일을 할 때 합법적인 절차를 밟았다.
옥타비아누스는 이렇게 원로원과 사이좋게 지내면서 로마가 발전하도록 많은 일을 했다.
원로원과 기사, 그리고 평민이 될 수 있는 자격과 그 역할을 정해 우리 로마의 사회 질서가 바로 잡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세금 제도를 제대로 갖추어 나라의 살림을 늘려나가며
그러기 위해서 인구 조사도 한다고 말했다.
그런가 하면 시민들에게 옛 로마의 전통을 지키도록 당부했고, 
아이를 많이 낳도록 돕는 정책도 펼쳤다.
시민들이 먹을 식량이 부족하지 않도록 곡물 수입에도 신경을 썼다.
그러나 전쟁을 일으켜서 더 많은 영토를 정복하는 일은 최대한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이렇게 아우구스투스가 펼친 여러 정책은 로마 안팎을 평화롭게 만들었다.
아우구스투스가 다스리던 때 로마는 경제적으로도 크게 발전했다.
속주로부터 시민들이 계속 들어와 인구도 많이 늘어났다.
로마는 지중해와 지중해 주변 지역의 중심으로 우뚝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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