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실학자·고증학자·
서예가·역사학자·금석학자이다.
후학도 많고 관직에도 나가서
중요한 역할을 많이 했다.
본관은 경주, 자는 원춘·추사
호는 완당·예당·시암·과파·노과·
농장인·보담재·담연재·천축고선생 등
본관은 노론 벽파 명가인 경주 김씨로
영조의 딸 화순옹주의 증손주인데
화순옹주는 자식이 없었고
김정희의 조부가 양자로 들어간 것이기
때문에 직접 피가 이어지지는 않는다.
24세 때 생부 김노경을 따라
연경에 가서 옹방강·완원 같은
청의 이름난 유학자들과 교유하며
진적을 함께 감상하고 경학 및 금석문과
서법에 대한 가르침을 받고 귀국했다.
이후 조선 금석학파를 성립시켰고
독특한 추사체를 완성시켰다.
당시 청나라에는 '금석학'이라는
학문이 유행했다.
금석학이란, 금석(비석)에 새겨진
명문을 해석하는 학문으로
청나라 대표학자 '옹방강'과 교류하며
금석학을 익힌 김정희는
북한산에 있는 비석의 정체를
발견해낸다.
그 비석의 정체는 바로
‘진흥왕순수비’였다
문인화론을 바탕으로 뛰어난
시서화 작품을 다수 남겼고
불교에 대한 이해도 높았다.
11년 동안 제주도와 함경도 북청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1819년(순조 19년) 문과에 급제하여
암행어사·예조 참의·설서·검교·대교·
시강원 보덕을 지냈다. 1830년 생부 김노경이
윤상도의 옥사에 배후 조종 혐의로
고금도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순조의
특별 배려로 귀양에서 풀려나
판의금부사로 복직되고, 김정희도 1836년에
병조참판·성균관 대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그 뒤 1834년 순조의 뒤를 이어
헌종이 즉위하고, 순원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이때 김정희는
다시 10년 전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되어
1840년부터 1848년까지 9년간
제주도로 유배되었고 헌종 말년에
귀양이 풀려 돌아왔다.
그러나 1851년 친구인 영의정 권돈인의
일에 연루되어 또다시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다가 2년 만에 풀려 돌아왔다.
이 시기는 안동 김씨가 득세하던 때라서
정계에는 복귀하지 못하였다.
그는 아버지의 묘소가 있는
과천에 은거하면서 학예와
선리에 몰두하다가 생을 마쳤다.
김정희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기백이 뛰어나서 일찍이 북학파의 일인자인
박제가의 눈에 띄어 어린 나이에
그의 제자가 되었다. 그로 말미암아
그의 학문 방향은 청나라의 고증학
쪽으로 기울어졌다. 24세 때
아버지가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갈 때
수행하여 연경에 체류하면서,
옹방강·완원 같은 이름난 유학자와
접할 수가 있었다. 이 시기의
연경 학계는 고증학의 수준이
최고조에 이르렀었다.종래 경학의
보조 학문으로 존재하였던
금석학·사학·문자학·음운학·천산학·지리학
등의 학문이 모두 독립적인 진전을 보이고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금석학은 문자학과
서도사의 연구와 더불어 독자적인
학문 분야로 큰 발전을 이루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경학을 비롯한
모든 분야에서 많은 영향을 받아
귀국 후에는 금석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리고 금석 자료를 찾고 보호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 결과 북한산순수비를 발견하고
『예당금석과안록』·「진흥이비고」와 같은
역사적인 저술을 남기게 되었다.
그리고 깊은 연구를 바탕으로
후학을 지도하여 조선 금석학파를
성립시켰다. 그 대표적인 학자들로서는
신위·조인영·권돈인·신관호·조면호 등을
들 수 있다.
음운학·천산학·지리학 등에도
상당한 식견을 가지고 있음이
그의 문집에 수록된 왕복 서신과
논설에서 나타난다.다음으로
그의 학문에서 크게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불교학이다.
용산의 저택 경내에 화엄사라는
가족의 원찰을 두고 어려서부터
승려들과 교유하면서 불전을 섭렵하였다.
그는 당대의 고승들과도 친교를
맺고 있었다.
이와 같이 그의 학문은
여러 방면에 걸쳐서 두루 통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청나라의 이름난
유학자들이 그를 가리켜 ‘해동제일통유’라고
칭찬하였다. 그리고 그 자신도
이 미칭을 사양하지 않을 만큼
자부심을 가졌던 민족 문화의 거성적
존재였다.
예술김정희는 예술에서도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그의 예술은 시·서·화 일치 사상에
입각한 고답적인 이념미의 구현으로
고도의 발전을 보인 청나라 고증학을
바탕에 깔고 있었다.
그래서 종래 성리학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발전을 보여 온 조선 고유의
국서와 국화풍에 대하여는
철저하게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는 바로 전통적인 조선 성리학에
대한 그의 학문적인 태도와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천재적인 예술성(특히 서도)을
인정받아 20세 전후에 이미 국내외에
이름을 떨쳤다. 그러나 그의 예술이
본 궤도에 오른 것은 역시 연경에
가서 명유들과 교유하여 배우고
많은 진적주을 감상함으로써 안목을
일신한 다음부터였다.
옹방강과 완원으로부터
금석문의 감식법과 서도사 및
서법에 대한 전반적인 가르침을 받고서
서도에 대한 인식을 근본적으로 달리했다.
옹방강의 서체를 따라 배우면서
그 연원을 거슬러 올라
조맹부·소동파·안진경 등의
여러 서체를 익혔다
다시 더 소급하여 한·위시대의
여러 예서체에 서도의 근본이 있음을
간파하고 본받기에 심혈을 기울였다.
추사체는 말년에 그가 제주도에
유배되었을 때 완성되었다.
타고난 천품에다가 무한한
단련을 거쳐 이룩한 고도의
이념미의 표출로서, 거기에는
일정한 법식에 구애되지 않는
법식이 있었다.
당시 서화가로서 그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조선 후기 예원을 풍미하였다.
현전하고 있는 그의 작품 중
1974년 국보로 지정된 「세한도」와
「모질도」·「부작란도」 등이
특히 유명하다.
시·서·화 이외에 그의 예술에서
빠뜨릴 수 없는 것이 전각이다.
전각이 단순한 인신의 의미를
넘어서 예술의 한 분야로 등장한
것은 명나라 중기였다.
김정희는 등석여의 전각에
친밀히 접할 수가 있었고,
그밖에 여러 학자들로부터
자신의 인각을 새겨 받음으로써
청나라의 전각풍에 두루 통달하였다.
문학김정희의 문학에서
시 아닌 산문으로서 한묵을 무시할 수 없다.
단순한 편지가 아니라
편지 형식을 빌린 문학으로서
수필과 평론의 기능을 가지는 것이다.
문집은 대부분이 이와 같은
편지 글이라고 할 만큼 평생 동안
편지를 많이 썼다.
새로운 학문과 사상을 받아들여
조선 왕조의 구문화 체제로부터
신문화의 전개를 가능하게 한
선각자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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