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 / 2022. 4. 1. 08:48

진흥왕(534 ~ 576), 재위(540년 ~ 576년) 신라제24대 임금 6세기 중반

반응형

진흥왕은 가야와 한강 유역의 땅을 차지하고 함경도까지 진출하는 등 신라의 영토를 넓히고 삼국을 통일하는 기초를 닦은 왕이다.

국사를 편찬하다

545(진흥왕 6) 이사부가 신라의 역사를 정리한 국사(國史)를 편찬할 것을 건의하자, 진흥왕은 대아찬 거칠부에게 명령하여 편찬 작업을 진행하도록 하였다.

사서의 편찬이란, 자신들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할 만큼 역량을 갖추고 왕권의 신장이 뒷받침되어야 비로소 편찬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신라가 왕권 중심의 중앙집권적 고대국가로 발전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진흥왕이 어린 나이로 즉위했음에도 군정운영이 가능했음은, 이사부, 거칠부 등의 유능한 신하의 조력도 있었겠지만, 선대 지증왕부터 법흥왕 시기에 신라 왕권이 크게 성장했기 때문이었다.

진흥왕 순수비

그는 전쟁을 통해 영토를 크게 확장한 정복 군주였다.

당시 한반도는 고구려와 백제가 치열한 각축을 벌이고 있었고,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포함한 중부 지역까지 장악하고 있었다.

한강 유역은 중국과 한반도를 연결하는 중요한 교통로의 요지로서, 전략적 요충지였다.

고구려에게 한강 유역을 빼앗긴 백제는 그로 말미암아 힘이 크게 약화되었기에, 이를 되찾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었다.

진흥왕은 백제와 군사 협력 관계를 공고히 하면서 고구려를 견제하고 중부 지역으로의 진출을 꾀하였다.

드디어 551(진흥왕 12) 불과 18세의 나이였던 진흥왕은, 백제 성왕(재위 523~553)과 함께 고구려를 공격해 승리를 거두고 한강 상류 지역을 확보했다.

이어 553년에는 백제마저 물리치고 한강 하류 지역까지 차지하여 한강 유역 전체를 신라의 영토로 삼았다.

이에 격분한 백제가 신라를 공격했으나, 554년 관산성 전투에서 신라군이 성왕을 죽이고 대승을 거두어 한반도 중부 지역을 완전히 장악한다.

이어 562년에는 대가야를 정복하여 가야 지역을 완전히 신라 영토로 삼는 데 성공한다.

아울러 동쪽 해안선을 따라 북진하여 지금의 함경남도 함흥 지방까지를 영토에 편입시켰다. 이로써 고구려와 백제의 양강 구도가 형성되어 있던 한반도에서, 신라가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아니 오히려 그들 보다 우위에 서는 강국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

이러한 진흥왕의 영토 확장 업적은 그가 세운 순수비에 잘 나타난다. 순수란 왕이 영토 각지를 돌아다니며 천지 산천에 제사하고, 방문한 지방의 정치와 민심의 동향을 살피던 행위이다. 순수비는 왕이 순수한 것을 기념하고, 왕의 덕과 업적을 찬양하기 위한 글을 새겨 세운 비석을 말한다.

진흥왕은 자신이 정복한 지역에 순수비를 세웠는데, 현재까지 모두 4개가 확인된다.

561(진흥왕 22)에 건립한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 568(진흥왕 29)에 세운 서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 마운령 신라 진흥왕 순수비, 황초령 신라 진흥왕 순수비가 그것이다.

불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다

진흥왕은 불교를 진흥시키는 데에도 크게 힘썼다.

553(진흥왕 14)에는 황룡사라는 신라를 상징하는 대사찰을 짓는다.

원래 진흥왕은 왕의 권위를 보여주기 위해 새로운 궁궐을 지으려 하다가 절로 바꾼 것이다. 이는 단순한 불교의 장려 차원을 넘어, 왕권의 위상과 정당성을 불교를 통해 확보하려는 의도를 보여준 것이다.

이렇듯 진흥왕은 불교를 장려하고 그것을 국가통치 이념으로 활용하는 불교 국가 신라를 만들었다.

 

화랑제도

진흥왕대에 화랑도제도가 처음 시작되었다.

화랑도란 리더인 화랑과 그를 따르는 무리인 낭도로 구성된 청소년 자치 수련 조직 겸 군사조직이다.

신라에서 그전까지 이러한 청소년 조직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진흥왕대 이를 체계적으로 만들고 국가에서 지원하였다.

그런데 진흥왕이 화랑도 제도를 시작한 것은 청소년에 대한 교육이나 군사 활동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진흥왕이 영토를 확대하면서 신라는 더욱 발전하였는데, 이에 커진 나라에 일할 인재가 더 많이 필요하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에 인재를 선발하는 제도가 마땅히 없어서 고민하였다.

그러다가 576(진흥왕 37) 봄에 원화 제도를 시행하였다.

이는 두 명의 미녀를 선발하여 원화로 삼고, 두 사람을 따르는 무리들을 모아 함께 생활하면서 관찰한 후, 그 중 뛰어난 인재를 선발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첫 번째 선발된 두 명의 원화 사이에 시기가 심하여 반목하다가, 다른 원화를 살해하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원화 제도는 폐지된다.

이후 아름다운 남자를 뽑아 단장하여 화랑이라 받들게 하였다.

낭도의 무리가 모여들어 서로 도의를 닦고, 이 과정에서 조정에 추천할 만한 인재가 가려지게 되었다.

이후 신라의 많은 인재들이 화랑도를 통해 실력을 키워 나라의 큰일을 하는 인재들로 성장하였다.

그리고 그 많은 인재들의 힘으로 신라는 더욱 발전할 수 있었고, 결국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할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기반을 만든 것이 바로 진흥왕이었던 것이다.

반응형
  • 네이버 블로그 공유
  • 네이버 밴드 공유
  • 페이스북 공유
  • 카카오스토리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