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1년 11월 25일 경상도 안동부 예안현
진사 이식의 7남 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여덟 남매의 막내인 퇴계에게는
형이 여섯, 누나가 하나 있었다.
아버지는 이황이 7개월이 될 때
40세의 나이로 죽고 성장 때까지
친어머니 춘천 박씨의 보살핌
아래에서 자랐다.
6세 때 이웃 노인에게 천자문을 배워
학문의 길에 들었고,
12세에 숙부 이우가 병환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요양하고 있을 무렵
논어를 배우며 본격적인 학문을 시작하여
19세 때 주희의 성리대전을 독파하고서는
성리학의 체계를 친숙히 알게 되었다.
20세에 주역을 공부하다가
몸을 엄청 망가뜨리며 이후 점점
건강이 안 좋아졌다고 한다.
21세 허씨 부인과 결혼하지만
허씨 부인은 아들을 낳고서
죽는다.
30세에 둘째 부인 권씨와 혼인하지만
권씨의 가정사가 정치에
크게 희생당한 삶이였기에
이 과정 속에서 어린 권씨는
정신질환을 얻게 되었다.
아내 대신 집안 살림을 하면서
아내를 물적으로도 심적으로도 보살핀다.
권씨 부인은 이황이 46세가
될 때 아이를 낳다가 죽는다.
그리고 4년 뒤에 둘째 아들도
24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다.
이황은 23세에 성균관에서 공부하였고
24세부터 과거 시험에 응시하였으나
3번 낙방하였다.
45세에 을사사화에
엮이며 파직당하다가
오래지않아 복직하고
50세에 형 이해가 사화에
휘말리며 유배가는 길에 죽는다.
모진 정난과 가정사를 맞은
이황은 단양군수, 풍기군수 등의
외직을 다닌다.
풍기군수 재직 시절
주세붕에게 건의해 최초로
사액 서원인 소수서원을 짓게 된다.
50세가 되며 확고하게 귀향을 결심하고
60살에 고향에 도산서원을 지어
후학을 양성했다.
귀향 후 다양한 학문적 활동을
펼치면서 대학자로서 자리매김했다.
기대승과의 사단칠정논변은 한마디로
이황의 사상을 만들어 낸 세기의 논쟁이다.
이황은 58세의 대사성, 기대승은
갓 과거에 급제한 32세의 신출내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서로를
존중하는 가운데 13년동안 편지를
주고 받으면서 치열한 철학적 논쟁을
이어나갔고, 이황은 기대승의 견해를
자신의 학설에 일부 수용하기도 하였다.
『주자대전』 등 주자학 관련서적을
주해·편찬하고 후진들을 양성하여
영남학파 및 친영남학파를 포괄한
거대한 주리파 철학을 형성했다.
68세에 무진육조소와 『성학십도』를
써서 선조에게 바쳤다.
사후 그를 기리는 서원을 지어
도산서원 사액을 받고 위폐를 모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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