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동학 농민 혁명의 지도자
전봉준은 천안 전씨
서당이나 한약방 등을 운영한 것을 보면
조선 말기에 흔했던 몰락한 중인
또는 양반 집안으로 보인다.
전봉준의 부친 전창혁은
고부 마을에서 향교의 장의를
했다고 한다.
촌로들에 따르면
전창혁은 장의가 아니라
동리의 일을 보는 사람(지금의 이장)
이었다고도 하였다.
전봉준은 이런 아버지 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다른 아이들처럼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했다.
유난히 키가 작아 5척(약 152cm)에
불과했고 성인이 되어서도
녹두라는(콩과의 한해살이풀 중 하나) 별명을
들었는데 가장 유명한 별명인
녹두 장군도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젊었을 때의 가정 생활은
상당히 곤궁했으며땅은 논밭을 다 합쳐
세 마지기밖에 되지 않았다고 하는데
당시 빈농층이 소유했던 평균적인
수준이기는 하나 한 가족이 살아가기에는
턱없이 모자라는 면적이다.
태인에서 살다가 30살 즈음
고부 마을로 들어와 서당을 열어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하고 한약방을
차려 한의사 생활을 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풍수지리를 보거나
사람들의 길흉사에 날을 잡아주기도
했으며 편지를 대필해 주기도 했다.
30대 때 동학에 들어가 접주가 되었고
1890년대 초반에는 운현궁에 있으면서
2년 남짓 흥선대원군의 식객으로
있었던 적도 있다.
이에 연이 닿아
동학농민운동 과정에서 흥선대원군이
밀사를 보내어 전봉준과 밀통하려고
시도하기도 하였다.
고부 봉기 직전 전봉준의
가장 두드러지는 행보는 1893년의
김제 금구집회 참여이다.
금구집회는 '척왜양창의'를(일본과 서양 세력을
배척하여 의병을 일으킨다는 의미)
외친 보은집회와 유사하게 '척양척왜'를
구호로 내세웠으나,
최시형의 교주신원운동의
연장선인 보은집회와는
맥을 달리했다.
애당초 보은이 아닌 금구에
별도로 집결했다는 뜻은,
남접 세력(남접은 동학신도가 다수
포함되어 있었으나 몰락 농민과 빈농 등
반봉건 세력들의 모임)들이 조정과
타협적이었던 최시형의 북접과
분리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전봉준도 접주로서(각 지방의 책임자)
금구집회에 참석했다가,
보은집회가 해산하자 같이
해산하였다.
전봉준의 고부 봉기는
단순히 학정으로 인해 우발적으로
터져나온 봉기가 아닌, 동학도들의
조직화와 정치 세력화라는
맥락 안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이 무렵 유명한 탐관오리였던
고부군수 조병갑의 횡포가 극심했다.
조병갑이 모친상을 당한 후
부조금으로 2천 냥을 거둬오라는
요구에 전봉준의 아버지 전창혁이 마을 대표로
나서 항의하다가 화가 치민
조병갑한테 곤장을 맞아 죽는
일이 벌어진다.
이후에도 조병갑의 횡포는
계속되어 자기 아버지의 공덕비를
세우는 비용을 백성들에게 전가했는데
만석보라는 이름의 저수지를 백성들의
노동력을 동원해 건설하고 사용료도
백성들에게 강제로 징수하여 착취하며
지방 토호들에게도 돈을 빼앗는 등
점입가경으로(시간이 지날수록 하는
짓이나 몰골이 더욱 꼴불견) 치달았다.
결국 분노한 그는
이 때부터 나라를 개혁하겠다는 뜻을
품게 되었는데 1894년 농민 1천여 명을
이끌어 민란을 일으켰으며
만석보를 헐어버리고 관아를 습격해
빼앗긴 곡식을 되찾아
농민들에게 나눠주었다.
조선 정부에서는 부랴부랴
조병갑 등의 부패한 관리를 처벌하고
새로이 박원명을 고부군수로 임명한 후
안핵사 이용태를 보내 잘못을 시정하겠다고
하였는데 사태를 추스르기 위하여
파견된 이용태 또한
극심한 횡포를 부렸다.
전에 왔던 새로운 군수 박원명은
할 수 있었던 일이 없어 별 도움은
안 되었어도 농민들을 달래주기라도 했지만
이용태는 전혀 아니었으며 농민들을
고문하고 처형하는 행패를 부렸다.
이에 분노한 전봉준은
1894년 3월 각 지역의 동학 접주에게
글을 보내고 손화중, 김개남 등과 함께
동학 교도와 농민 1만여 명을 모아서
동학 농민군을 조직하며 동학농민운동을
일으켜 안핵사 이용태를
도주하게 만들었다.
이 때 동학 교도 중심의 북접은
폭력에 반대하여 동학 농민군에
호응하지 않았다.
이후 동학 농민군은 승승장구하여
전주성을 점령하는 등 세력이 확대되었고
깜짝 놀란 조선 조정과
전주 화약을(1894년 동학 농민 운동 당시
농민군이 전주를 점령하고 정부와
맺은 조약) 맺으면서
잠시 평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하지만 조선 조정이 파병을
요청한 청나라군과 톈진 조약을(텐진 조약의
내용은 조선에서 “청 · 일 양국 군대는
동시 철수하고, 동시에 파병한다.”이다)
핑계로 다시 파병한 일본군이 이미
조선 땅에 들어온 뒤였고 이들이
청일전쟁을 벌이면서 잠시 동안
이어진 평화는 깨지고 만다.
청일전쟁 도중 일본이 군대를 보내
경복궁을 점령하고 고종을 위협하면서
갑오개혁을 시행하자 전봉준은
'척왜근왕'을 외치며
동학 농민군을 모았다.
북접도 이에 합류하면서
한양을 탈환하기 위해 북진을
시작하였으나 공주 우금치에서 기관총을
비롯한 근대 무기와 월등한 조직력을
갖춘 조선 관군과 일본군에게 대패했고
몇 번 더 패전을 당한 끝에
순창으로 퇴각하였다.
전봉준은 군대를 모아
재기하려고 하였으나 순창군 피로리에서
만난 옛 부하 김경천의 밀고로
체포되어 도성으로 압송되었고 재판 후
동학농민운동을 지도했던 같은 지도자급의
동지인 손화중(1861~1895), 최경선(1859~1895),
성두환(1845~1895),
김덕명(1845.10.29~1895.4.23)과 함께
1895년 3월 29일(음력) 사형을 선고받고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아 30일 새벽 2시
한양 무악재 아래에서 교수형으로
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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