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남도 강서 출생
아버지 순흥 안씨 흥국
어머니 제남 황씨 사이의 3남 1녀 중 셋째
1894년 16세의 청년 도산은 평양에서
벌어지는 청일전쟁을 목격
선교사 밀러를 만나 밀러학당에 입학
신학문을 교육받고 기독교인으로 입교
밀러학당에서의 3년간의 수학시절은
인생관과 세계관을 크게 넓혀줌
졸업 후 독립협회 민권운동에 참여
열강들의 한국침투를 세계사의 거부할 수 없는
흐름으로 인식한 선생은 그 안에서
대한제국이 나아갈 길을 생각함
평양의 쾌재정에서 열린 만민공동회에서
무능한 관료들을 비판한 연설로 주목 받은 이후
가는 곳마다 많은 청중들을 웅변으로 감동
독립협회가 정부의 탄압을 받아 해체
1902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샌프란시스코에서 한국인 친목회를 조직
1905년 11월의 을사조약 체결 소식을 듣고
국내에서 구국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이듬해에 귀국
‘신민회’라는 비밀 결사 독립 운동 단체를 조직
신민회는 교육 기관을 세워 청소년을 교육하고,
국민에게 민족 사상과 독립 사상을 심어 주며
여러 상공업 기관을 만들어 국민의 재산을
늘리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었다.
그 실현을 위해 안창호는 평양에 대성 학교를 세웠다.
또한 평양에 도자기 회사를 세워 교육과
문화, 산업 등 여러 분야에서 활동했다.
《대한 매일 신보》를 만들어 활동
1910년, 안창호는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 사건에
관련, 체포되어 옥살이를 한 뒤 미국으로 망명
3 · 1 운동 이후 안창호는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 정부에서 활약하였다.
그렇게 미국과 중국을 오가며 독립 운동에
힘쓴 안창호는 1932년 윤봉길 의사의 폭탄 사건으로
붙잡혀 감옥살이를 했다.
일본이 중국과 전쟁을 벌이기 한 달 전,
일본은 한국의 민족주의자를 모두 잡아들였다.
이를 ‘동우회 사건’이라고 하는데,
안창호는 이 사건에 연루되어 또다시 감옥살이를 했다.
심한 옥살이로 결국 건강을 해친
안창호는 끝내 목숨을 잃고 말았다.
'한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사임당(1504 ~ 1551) (0) | 2022.12.19 |
---|---|
105인 사건 (0) | 2022.12.18 |
문종(1414 ~ 1452) (0) | 2022.12.15 |
세종대왕(1397년 ~ 1450년),(재위:1418~1450) (0) | 2022.12.14 |
소현 세자(1612년 ~ 1645년) (0) | 2022.12.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