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 / 2022. 12. 19. 21:22

신사임당(1504 ~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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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은 신인선(확실한 것은 아님)
사임당은 당호
1504년(연산군 10년) 외가인 
강원도 강릉 북평 출생
서울 사람인 아버지 신명화와 
강릉 사람인 어머니 용인 이씨 
사이에서 다섯 딸 중의 둘째로 태어남

시와 그림에 능한 예술가
율곡 이이를 낳은 훌륭한 어머니
훌륭한 작품을 남긴 천재 화가

사임당은 7세 때부터 스승 없이 

그림 그리기를 시작했고
[몽유도원도], [적벽도], [청산백운도] 등의 

산수화를 보면서 
모방해 그렸고 특히 풀벌레와 포도를 

그리는 데 남다른 재주가 있었다.
그녀가 살았던 시기에는 산수도를 

잘 그린 화가로서 명성이 자자했다


사임당이 결혼한 것은 1522년인 19세
남편은 덕수 이씨 가문의 이원수이다. 
이후 2년 뒤인 21세 때 맏아들 선, 

26세 때 맏딸 매창, 
33세에 셋째 아들 율곡 이이를 낳는 등 

모두 4남 3녀를 낳아 길렀다
사임당은 38세 때 서울 시집에 정착하기까지 
근 20년을 강릉에서 친정 어머니인 

용인이씨와 살았다
조선초기까지도 전통적인 친정살이 

혼인 풍습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38세 되던 해에 시집살림을 

주관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다.
48세에 삼청동으로 이사했으며
같은 해 남편이 수운판관에 임명되어 
아들들과 함께 평안도로 갔을 때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사임당이 사망할 무렵 이이의 나이는 16세였다. 
십대 중반에 어머니를 여의자 
금강산에 입산할 정도로 방황했다. 
이후 어머니를 대신한 외조모의 
따뜻한 정은 각별했다.

화가로 유명했던 사임당이 
부덕의 상징으로서 존경받게 된 것은 
사후 1백 년이 지난 17세기 중엽,
조선 유학을 보수화로 이끈 인물인 송시열이 
사임당의 그림을 찬탄하면서 
천지의 기운이 응축된 힘으로 
율곡 이이를 낳았을 것이라는 
평가에서 비롯되었다. 


율곡이 유학자들의 존경의 대상이 되자 
사임당은 천재화가 보다는 
그를 낳은 어머니로 칭송받기 시작했다. 
사임당에 대한 유학자들의 존경은 
18세기 유학적 가치가 정점에 이른 시기에 
더욱 올라 마침내 그녀는 
부덕과 모성의 상징으로 변화해 갔다. 
말하자면 사임당의 이미지가 갖고 있는 
모성의 신화화는 17세기를 거치면서 생산되고 
18세기에 와서 형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임당의 일생을 돌아보면, 
현모양처 이전에 화가로서 
그리고 효녀로서도 훌륭한 여성이었다. 
화가라는 자신의 일생보다 아내로서, 
어머니로서의 삶이 더 부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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