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 / 2023. 1. 21. 09:19

독립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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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고종 33) 7월 설립한

 한국 최초의 근대적인

 사회정치단체


정부의 외세의존정책에 반대하는

 개화 지식층이 한국의 자주독립과

 내정개혁을 표방하고 활동


《독립신문》을 발간하여 

민중계몽에 나선 서재필을 중심으로 

이상재·이승만·윤치호 등이 적극 참여하였으며, 

협회 발족 당시에는 이완용·안경수 등 

정부 요인들도 다수 참가

초기에는 토론회·연설회 등

 민중계몽운동에 힘써서

 많은 젊은이들을 모았으며, 

나중에는 정치문제에 관심을

 표명하고 실천에 옮기게 됨
영은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워 

독립정신의 상징으로 삼음

1897년 2월에는 러시아 영사관에 

머물러 있던 고종에게 환궁할 것을 

호소하여 이를 결행하게 함
그러나 《독립신문》을 통한

 민주·민권 사상의 보급활동이

 큰 힘을 발휘하여 지도자의 정부에

 대한 비판·비난이 격화되자 

당시 회장으로 있던 이완용이 

전라북도관찰사로 부임한 것을 

계기로 모든 정부관료 회원들이 탈퇴


따라서 윤치호가 회장이 된 이후로는

 이상재·남궁 억·이승만 등 청년층이 

중심이 되어 운영되었고, 

서재필은 본회원은 아니었으나 

뒤에서 지도·후원


외국인 고문과 교관 초빙을 

맹렬히 반대하고, 지하자원 개발권 

및 철도부설권을 외국인에게 

허용하는 것도 외국 자본주의 밑에 

국가경제를 예속시키는 처사라고 

규탄하며 고종에게 거부하라는 상소를 

올림에 따라 러시아 군사고문관이 

본국으로 소환되고 한로은행도 

개설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폐쇄되는 결과를 가져옴

이와 같이 활동이 왕성해지고

 많은 사회단체 중 지도적 역할을

 담당하게 되자, 1898년 종로 광장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시국에 대한 ‘6개조 개혁안’을

 결의하고 그 실행을 

고종에게 주청

  
고종은 처음에 6개조의

 실행을 약속하였으나 정부 대신들이

 이권에만 눈이 어두워 약속한 지 

며칠이 지나도 아무런 실행을 보이지 

않았으므로 협회에서는 정부탄핵의

 외침이 점점 드높아 갔고,

 정부 수뇌급은 불안을

 느끼기에 이르름

이에 정부 수뇌급은 “독립협회가

 황제를 폐하고 공화제를 실시하려 한다”고

 무고함으로써 이상재 이하 17명의

 독립협회 간부를 체포


독립협회는 회원을 총동원하여 

석방을 요구하였으나, 정부는 어용단체인

 황국협회를 시켜 부보상 수천 명을 

서울에 불러들여 독립협회 회원들에게

 테러를 가하게 하여 

유혈사태를 빚었다. 
이에 흥분한 민중은

 고관의 집을 습격하는 등 

소란을 일으킴

11월 고종은 부득이 내각을 개편하고

 양 협회 대표자에게 그들의 

요구를 모두 수용할 것을 약속하고 해산을 명하였다. 
이로써 협회는 해산되었으나, 

그 후 만민공동회라는 이름으로 존속하다가 

1898년 말 해산하였고, 그 후 

대한자강회와 대한협회로 

그 정신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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