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 / 2023. 1. 2. 09:57

세조(1417 ~ 1468, 재위 1455~1468), 수양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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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7대 왕

수양대군

세종의 둘째아들

문종이 사망하자 어린 단종을 제거하고

무력으로 왕위를 찬탈

어머니는 소헌왕후 심씨

윤번의 딸과 혼인-정희왕후

형인 문종에 비해 학문보다

무예에 능하고 병서에 밝았으며,

 1445년(세종 27)에 수양대군에 봉해짐

세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문종이

재위 2년 3개월 만에 갑자기 승하하고,

12세의 어린 나이로 홍위(단종)가 즉위하자

자신이 왕위에 오르기 위한 야망을

가지게 되었다. 


수양대군은 권람·한명회·홍달손·양정 등

30여 인의 무인세력을 휘하에 두고

왕권을 찬탈하려는 계획을 구체적인 행동으로

옮기게 되었다.

 

1452년 10월 수양대군은

조선의 국왕이 되기 위해서는

명나라로 부터 환심을 얻어야 했으며

그 목적으로 사은사를 자처하여 명을 다녀왔다.

 

1453년(단종 1) 10월 10일 무사들을 이끌고

김종서를 살해한 뒤 사후에 왕에게 알리고

단종을 압박하여 왕명으로 중신들을 소집,

영의정 황보인, 이조판서 조극관·찬성 이양 등을

궐문에서 죽이고 우의정 정분 등을 유배시켰다.

그리고 동생 안평대군을 강화도로

유배시킨 뒤 사사하였다.

역사에서는 이를 계유정란이라고 불렀다.

 

이와 같이 일거에 실권을 잡은 수양대군은

영의정부사, 이조·병조판서, 내외병마도통사

등을 겸하면서 병마권을 장악하고

좌의정에 정인지, 우의정에 한확을 임명하고

집현전으로 하여금 수양대군 찬양의

교서를 짓게 하였다.

1455년 단종을 겁박하여

왕위를 자신에게 선위하게 하고

마침내 왕위에 올랐다.

 

단종은 상왕으로 권좌에서 물러났지만

이미 유학이 정치적 이념으로 자리잡은

조선에서 충신들에 의해 단종 복위를

도모하려는 사육신사건이 일어났다.

집현전 출신의 유학자인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류성원이 주도하여 일어난

사건으로 세조를 살해하려는 목적이었지만

사전에 발각되어 관련자의 가족까지

모두 참수되었다. 당시 조선은

사회적 불안이 높아졌고 세조에 대한

민심은 흉흉해졌다. 후대에도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기 위해 일으킨

계유정란은 권력욕 이외 명분없는

반란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그의 치적에는

괄목할 만한 것이 많다.

 

의정부의 정책결정권을 폐지,

재상의 권한을 축소시키고

6조의 직계제를 부활시켜 왕권을 강화했으며,

이시애의 난(1467)을 계기로 유향소를 폐지하고

토호 세력을 약화시키는 등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였다.

(*유향소란
조선시대 사족들이 자신들의 위세를

 과시하고 이익을 지켜나가기

 위해 만든 조직
유향소의 사족과 수령이 결탁하여
백성들을 괴롭히자
세조는 다시 유향소를 혁파)

국방력 신장에 힘써 호적·호패제를 강화,

진관체제를 실시하여 전국을 방위체제로

편성하였으며 중앙군을 5위 제도로

개편하였다.  북방개척에도 힘써

1460년(세조 6) 북정을 단행,

신숙주로 하여금 두만강 건너

야인을 소탕하게 하고, 1467년(세조 13)

서정을 단행, 강순 ·남이·어유소 등으로

건주 야인을 소탕하는 등 서북면 개척에

힘쓰는 한편, 하삼도 백성을 평안·강원·황해도에

이주시키는 사민정책을 단행하는 등

국토의 균형된 발전에 힘썼고

각도에 둔전제를 실시하였다.

(둔전 : 농사도 짓고 전쟁도 수행한다는

취지 하에 부근의 한광지를 개간,

경작해 군량을 현지에서 조달함으로써

군량운반의 수고를 덜고

국방을 충실히 수행하기 위한 것)


경제정책에서 과전법의 모순을

시정하기 위하여 과전을 폐하고

직전법을 실시, 현직자에게만 토지를

지급하여 국가수입을 늘렸다.

또한 궁중에 잠실을 두어 비와 세자빈으로

하여금 친히 양잠을 권장하도록 하는 한편,

《사시찬요》 《잠서주해》 《양우법초》 등의

농서를 간행하여 농업을 장려하였다.

성삼문 등 집현전 학사들이

단종복위운동에 가담하자

집현전을 폐지하였으나

문교면에도 진력하여 제도를

정비하고 많은 서적을 편찬하였다.

그는 즉위 전에 《역대병요》 《오위진법》을

편찬했으며, 1465년(세조 11)에는

발영 ·등준시를 두고 인재를 널리 등용하였다.

《역학계몽요해》, 《훈사십장》, 《병서대지》 등

왕의 친서를 저술하고 《국조보감》, 《동국통감》 등의

사서를 편찬하도록 했다.

 

국초 이래의 《경제육전》, 《속육전》, 《원육전》,

《육전등록》 등의 법전과 교령·전례를

종합 재편하여 법전을 제정하고자

최항·노사신 등에게 명하여 《경국대전》을

편찬하게 함으로써 성종 때 완성을 보게

한 것은 그의 치적 중에서도 특기할 만하다.

 

그는 불교를 숭상하여 1461년(세조 7)

간경도감을 설치하고 신미·김수온 등에게

《법화경》, 《금강경》 등 불경을 간행하게

하는 한편, 《대장경》 50권을

필인하기도 했다.

그의 능은 경기 남양주시의 광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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