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원(1367 ~ 1422) 왕자의 난
아버지 이성계 휘하에서 구세력 제거에 큰 역할을 하였으나 세자책봉에 불만을 품고 정도전 등을 살해하는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즉위 후, 의정부(議政府), 삼군도총제부(三軍都摠制府)를 설치하는 등 관제개혁을 통하여 왕권을 강화하였고 최고의 법사(法司)인 의금부(義禁府)도 설치하였다.
태조의 부인은 두명이고 아들은 총 여덟이다.
첫번째 부인 신의왕후 한씨는 방우(진안대군), 방과(영안대군), 방의(익안대군), 방간(희안대군), 방원(정안대군), 방연(덕안대군), 경신공주, 경선공주를 낳았고
두번째 부인 신덕왕후 강씨는 방번(무안대군), 방석(의안대군), 경순공주를 낳았다.
고려시대는 부인을 두명 두는 것도 합법적이었다라고 말할 수 있다.
시골에 둔 부인을 향처, 서울에 둔 부인을 경처라고 했다.
경처였던 신의왕후 한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던 다섯번째 아들 방원이었다.
방원은 태조 이성계의 아들중 가장 공부에 두각을 나타냈다고 할 수 있다.
유일하게 과거에 급제하게 된다. 1382년 16세의 나이에 진사과에 합격하고 1383년에 문과에 급제를 하게 된다.
고려시대의 과거시험 식년시 같은 경우 3년에 33명을 뽑게 되므로 경쟁이 상당히 치열하다고 볼 수 있다.
이방원은 문˙무를 겸비한 영리한 젊은이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태종의 외모는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태조가 높은 코에 용의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태종의 용모가 이를 닮았다'라는 기록이 있고, 1394년(태조3년) 방원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게 되었는데 그때 태조가 이런 말을 한다.
"명나라 황제가 만일 묻는 일이 있다면 네가 아니면 대답할 사람이 없다."
정안군이(방원) 대답하였다.
"종묘와 사직의 크나큰 일을 위해서 어찌 감히 사양하겠습니까?"
이에 태조가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말하였다.
"너의 체질이 파리하고 허약해서 만리의 먼 길을 탈 없이 갔다가 올 수 있겠는가?"
태종 이방원은 큰 체격은 아니었지만 날렵하고 단단한 모습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볼 수 있다.
조선이 건국된 이후 방원은 크게 자리를 차지 하지 못한다.
이유는 고려말 충신 정몽주를 죽인 뒤 아버지 이성계로 부터 심한 질책을 받았다.
태조 이성계는 정도전, 정몽주 함께 새나라를 이끌어 갈 계획이었으나 아들인 이방원이 정몽주를 제거해 버렸다.
이성계는 정몽주와 친분이 두터웠고 정몽주의 능력을 알고 있던 터라 새왕조를 개창하는데 끌어 들이려는 생각하고 있었다.
고려 왕조를 끝까지 지키려고 몸부림치던 정몽주에게 이성계 일파를 제거할 기회가 딱 한 번 있었다. 이성계가 해주에서 사냥을 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몸을 크게 다친 적이 있었다. 그래서 개경에 오지 못하고 벽란도에서 요양을 하고 있었다. 이때 정몽주는 하늘이 준 기회라 여기며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려 했다.
그러나 정몽주의 계획은 이방원 때문에 틀어져 버렸다. 절체절명의 위기라고 생각한 방원이 한밤중에 벽란도로 달려가서 이성계를 개경까지 데려왔다. 정몽주는 크게 실망했다.
그러나 이성계의 몸 상태가 어느 정도인지 알아야 다음 일을 계획할 수 있기에, 이성계의 병문안을 핑계로 호랑이 굴이나 다름없는 이성계의 집으로 스스로 찾아갔다. 이때 이방원이 정몽주에게 시를 한 수 들려 주었는데, 그게 바로 유명한 하여가(何如歌).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어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어져 백년까지 누리리라.
한마디로 말해서 고단한 인생 살지 말고, 우리 편에 붙어서 서로 사이좋게 영원히 살아가자는 회유였다. 정몽주가 이에 단심가(丹心歌)로 답한다.
이 몸이 죽어죽어 일백 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나는 백 번을 다시 죽어도 고려 왕조를 섬길 것이니, 나를 설득할 생각을 버리라는 준엄한 경고였다. 이 시를 이방원에게 들려 주고 정몽주는 이성계의 집을 빠져나왔다. 이방원이 생각하기에 정몽주를 설득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그래서 급히 부하를 보내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살해했다.
태조 이성계의 주도로 1392년 7월 17일 조선이 건국되고
1394년 한양천도, 경복궁 창건, 국가 체제 정비 등 나라의 주요 기틀을 마련하는데 정도전이 핵심 역할을 한다.
이때 이방원은 뒤로 물러나 힘을 잃은 상황이었다.
이때 이방원을 더욱 힘들게 한 일이 일어 나는데 태조 이성계의 후계자로 막내아들 방석을 책봉한다.
방석이 후계자가 된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방석의 생모이자 이성계의 경처 신덕왕후 강씨 때문이었다.
이성계는 적장자 방우를 후계자로 책봉하려 하였으나 몰래 옅들은 신덕왕후 강씨가 눈물을 흘리며 하소연을 했다.
또한 정도전이 방석이 세자책봉을 적극지지 했는데 이유는 비록 왕조국가지만 권력은 재상중심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적장자 보다는 재상의 역할이 많이 필요한 인물이 왕이 되어야 한다고 정도전은 생각했다.(방번이 되지 못한 이유 : 고려 공양왕의 조카딸과 혼인했기 때문에 세자책봉에서 제외, 조선의 왕비가 고려왕실의 인물은 부담스럽다고 판단)
정도전은 방석의 왕위계승에 왕자들의 사병이 위협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하여 사병혁파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정도전의 주도로 사병혁파가 이루어진다. 또한 왕자들이 보유한 무기도 반납을 요구한다. 이방원이 사병을 상당히
많이 보유했기 때문에 이방원을 견제 했다고도 볼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이방원과 정도전이 충돌하게 되는데
이방원이 선제공격을 준비하게 된다.
태조 이성계는 병이 깊어 왕자들이 모두 경복궁에 문병을 간사이 몰래 빠져나온 방원은 정도전이 자신의 절친인
남은의 첩의 집에서 술을 마신다는 정보를 입수해 몰래 궁궐을 빠져나가 정도전을 제거한다.
왕세자로 책봉된 방석도 처형한후 둘째 방과를 왕세자로 추대한다.
이것이 1398년(태조7년) 1차 왕자의 난이다.
방원이 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키고도 왕이 되지 않은 이유는 적장자가 왕위를 계승하지 못한 잘못을 바로 잡는다는 것이방원의 명분이다. 그때 적장자 방우는 이미 돌아가셨고(기록에 의하면 방우는 매일 술을 드셨다고 함) 둘째 방과(정종)가
왕위에 올랐다. 정종은 1400년에 방원에게 양위를 하며 스스로 왕위에서 물러난다.
방원은 정도전의 집을 몰수하여 말먹이는 관청인 사복시를 정도전의 집터에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