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 / 2023. 1. 14. 09:36

진주 민란(임술년)(186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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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에 조선은 세도 정치와 

삼정의 문란으로 인해 

사회가 매우 어지러웠다. 

특히 관청에서 일하면서

 수탈을 일삼는 벼슬아치들 때문에 

농민들의 생활이 무척 어려웠다. 

하지만 농민들도 이전과는 생각이 달라져서

 관리들의 횡포를 그냥 참고 견디지 않았다. 

농민들은 집단으로 들고일어나

 탐관오리들에게 저항하거나

 조세 제도의 개혁을 요구하기도 했다.


진주 농민 봉기의 직접적인 원인도

 삼정의 문란 때문이었다. 

당시 경상 우병사로 있던 

백낙신과 진주 목사 홍병원이 

갖가지 이름으로 농민들에게 

과중한 세금을 거두어들였다. 

참다못한 유계춘과 이귀재 등이 

항의 문서를 만들어 관청에 고발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화가 난 진주 지역의

 농민들이 들고일어나 관청을

 공격하고 진주성을 점령했다.

진주 지역에서 농민들이 

봉기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조선 조정은 사건의 원인을 알아보기

 위해 ‘안핵사’라는 직책의 조사관을

 내려 보냈다. 안핵사로 파견된 

박규수는 농민 봉기의 원인이 

관리들의 횡포와 수탈에 있음을 확인했다.

 이후 조정은 문제가 된

 관리들을 내쫓았지만,

 봉기에 앞장선 주동자들도

 체포해 처형했다.
진주 농민 봉기는 비슷한 처지에

 있는 다른 지역의 농민들에게

 커다란 자극을 주었다. 

충청도와 전라도, 경상도 등에서

 민란이 잇따랐고, 이는 점차 전국으로 

퍼져 함경도와 제주도에서도 

농민 봉기의 조짐을 보였다. 

이 시기에 잇달아 일어난 

농민 봉기를 1862년이 임술년이므로

 ‘임술 농민 봉기’라고 한다.

진주를 비롯해 전국 곳곳에서 

농민 봉기가 일어나자, 조정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삼정의 문란을 

바로잡고 정치와 사회의 개혁을 

추진할 방안을 의논했다.

 하지만 당시 지배층과 관리들이

 이에 반대하면서 근본적인 해결책은

 나오지 못했다. 반면 농민 봉기를 

통해 농민들의 의식은 크게 성장했으며,

 1894년에 일어난 동학 농민 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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