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전(鄭道傳, 1342∼1398)
본관 : 봉화
조상 : 봉화의 향리를 대대로 세습
아버지 : 정운경(집안 처음으로 과거급제 개경으로 상경, 관직 형부상서-법무부 장관) 개천에서 용남
21세 : 과거급제
34세 : 나주로 유배
42세 : 이성계를 만남
51세 : 조선 건국
57세 : 이방원에게 죽음을 당함
고려 후기에는 지방 향리 출신들이 과거를 통해 중앙 관료로 진출하는 경우가 많아 이런 경우를 신진사대부라고 부릅니다.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리학을 공부해야 했다. 고려 후기의 성리학은 원나라에서 들어온 그 성리학은 이후 조선에서 발달하는 이(理)기(氣)로 규정하는 철학이 아닌 수기치인(修己治人)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닦은 후 남을 다스린다'라고 하는 지배계층의 경세론이다. 고려 후기의 신진사대부들 안향, 이제헌, 이색, 정몽주 이들이 모두 지방 향리, 과거급제, 성리학을 공부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정도전이 과거에 급제해 관리가 되었을 시 그때 왕은 공민왕(고려 제31대 왕, 재위 1351~1374)이었다. 공민왕은 1356년에 반원 개혁에 성공한다. 무려 100년 가까이 지속되었던 원의 간섭을 물리치고 고려의 자주권을 회복한다. 그리고 개혁을 시작한다. 원元의 간섭으로 흐트러진 국가의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온 나라를 다시 시작한다.
공민왕의 개혁 정치
권세가가 억지로 빼앗은 토지를 본래 주인에게 돌려줄 것
권세가가 억지로 노비로 삼은 사람을 본래대로 회복할 것
하지만 강력한 저항에 부딪힌다. 대부분의 권세가들이 토지와 노비 문제에 불법을 행하지 않은 사람이 없기 때문에 아무리 왕이 추진한다고 해도 반대를 할 수밖에 없었다. 공민왕은 개혁을 이끌 수 있는 신진사대부들에게 집중한다. 그런데 공민왕의 눈에는 그들이 유약하고 용기가 없어 보였기에 승려였던 신돈을 중심에 세워 개혁을 추진해 간다. 신돈은 연고가 없기에 자기의 사익을 위해서 개혁을 망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신진사대부들이 신돈을 도와 개혁을 추진하기를 바랐다. 홍건적에 의해 불탄 성균관을 새로 지어주고 신진사대부의 존경을 받고 있던 이색을 성균관 검 대사성으로 임명하고 정도전, 정몽주, 이숭인 등 명망 있는 신진사대부들을 교관으로 임명해서 성리학을 교육하도록 한다. 성균관에 모여 학문적 토론을 하고 그것에 바탕을 두고 현실의 정치에 대해 논의를 하며 공민왕의 개혁정치에 힘을 보태는 정치적 세력으로 성장해 나간다. 개혁의 대상이었던 권세가의 반대가 거셌고 신돈이 모함을 받아 죽임을 당한다. 신돈이 죽은 후 공민왕이 직접 개혁을 하려고 했지만 그도 암살을 당하고 만다. 그 뒤 아들 우왕이 10살에 왕위에 오른다. 권문세족의 대표 이인임이 권력을 장악한다. 그의 권력은 무려 14년을 간다. 공민왕의 개혁을 모두 무효화할 때 신진사대부들과도 대립한다. 마침 그때 외교정책에서 충돌이 일어나는데 공민왕은 반원, 친명 정책을 추구했는데 이인임은 원과 명 사이에서 중립을 지향하는 등거리 외교를 주장하고 나선다. 신진사대부들은 이인임을 비난하며 거세게 반대하자 이인임은 이들을 강경하게 탄압하며 정도전은 나주의 거평부곡으로 유배를 하게 된다. 정몽주는 언양으로 유배를 간다. 나머지 신진사대부들은 뿔뿔이 흩어져서 유배를 당한다.
정도전은 3년 동안 나주에서 유배생활을 한다. 그곳의 부곡민들과 어울리고 그들에게서 고려의 민民을 발견하게 된다. 고려의 민이 이렇게 살고 있구나! 를 깨닫게 된다. 이인임의 권력은 더욱 강화되고 민의 토지를 빼앗고 양인을 노비로 만들며 매관매직을 일삼고 고려역사상 가장 나쁜 정치가 이인임 집권기 14년 동안 이루어졌다.
3년의 유배를 마친 정도전은 복직이 되지 않고 고향 영주에서 충북 제천으로 옮겼다가 다시 서울 삼각산 아래 삼봉재라는 서재를 열고 학생들을 가르친다. 그런데 삼각산 근처의 재상이 이 서재를 헐어버린다. 쫓겨난 김포로 옮겼지만 이번에도 서당이 헐리고 만다. 그런 후 부평으로 옮긴다.
우왕 9년 7월 이성계, 정몽주, 정도전은 한자리에 있었을 것이다. 정도전은 정몽주를 통해서 이성계를 만났을 확률이 크다. 이성계와 정몽주는 그 이전에 만났을 것이다. 정몽주와 정도전은 막역했다. 정도전이 16세에 과거에 뜻을 두고 있었는데 친구가 와서 정몽주의 뛰어남을 이야기한다. 정도전보다 5살 많은 정몽주의 이름을 듣게 되고 몇 년 뒤 정몽주가 장원급제를 하게 되어 유명한 사람이 된다. 이에 정도전이 정몽주를 찾아가고 이렇게 둘의 인연이 시작된다.
우왕 9년 가을
정몽주의 주선으로 이성계를 찾아 동북면으로 간다. 이 만남을 계기로 정도전의 인생이 바뀌게 되었고, 이성계 또한 순수한 군인에서 정치에 관심을 갖는 군인으로 바뀌게 된다. 또 하나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되는 역사적인 계기가 만들어진다. 이성계와 정몽주의 도움을 복직이 되고 얼마 뒤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을 하여 권력을 잡게 된다.
이성계는 신진사대부들을 등용하여 그들을 후원한다.
이때 신진사대부들의 첫 번째 개혁은 토지제도를 꼽았다. 내용은 농민은 수확의 1/10을 조세로 납부하고 있었는데 교통이 발달하지 않던 시대라 관리가 직접 지방의 조세를 거두는 것을 수조 권이라고 하는데 어느 때인가부터 관직에 물러난 사람들이 이 수조 권을 행사하는 일이 벌어진다. 농민들은 점점 더 조세가 많아지고 궁핍해지고 말았다. 이때 조준의 주장이 등장한다. 조준의 주장은 수조 권을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색이 반대하는데 반대논리는 오랜 관행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불법이긴 하지만 하루아침에 고쳐서는 안 된다라고 하며 개혁을 반대한다. 이성계가 강력히 후원한 조준이 승리하고 과전법이라는 새로운 토지제도가 만들어지는데 정도전은 조준의 주장에 미흡하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조세를 낸다면 자기 토지를 가진 농민들만 혜택이 돌아간다. 현재 고려에는 자신의 토지를 소유한 농민보다 남의 토지를 소작하는 농민이 매우 많기 때문에 이 사람들에 대한 대책이 빠졌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정도전의 개혁안은 전국의 토지를 모두 국유화하고 농사를 지을 사람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어 모두 자영농을 만들고 1/10을 내고 나머지로 먹게 살게 해야 한다라고 생각했지만 드러내 놓고 주장하지는 못하고 기록으로 남긴다.
정도전의 남다른 모습이 발견된다.
정도전은 할 수 있는 개혁이 아닌 해야 하는 개혁을 생각했던것이다.
'해야 될 일을 먼저 정하고 어떻게 하면 그 일을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생각의 방향' 이것이 남다른 정도전의 모습이다. 정도전의 토지개혁 구상은 토지를 갖고 있지 않은 수많은 백성들까지 배려했던 것이다.
이 상황에서 정도전은 이러한 질문을 던진다.
"군주君主가 민심을 잃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대단히 의미 있는 질문이다.
그리고 맹자를 인용해 "군주가 민심을 잃으면 혁명을 해야 한다."
혁명의 정당성이 이렇게 만들어 졌다.
정몽주는 이에 "민심을 잃어도 군주에게 충성해야 한다."
조선이 건국된 뒤에 정도전은 이렇게 말한다.
임금의 자리는 높기로 말하면 높고 귀하기로 말하면 귀하다.
그러나 천하는 지극히 넓고 만민은 지극히 많다.
한 번 그들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아마 크게 염려할 일이 생기게 되리라
아래 백성들은 지극히 약하지만, 힘으로 위협할 수 없고,
지극히 어리석지만, 꾀로 속일 수 없다.
그들의 마음을 얻으면 복종하고 그들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배반한다.
그들이 배반하고 따르는 그 차이는 털끝만큼도 되지 않는다. <조선경국전>
혁명론으로 조선 건국을 정당화한다.
조선이 건국된 후 조선의 설계도를 구상한다. 먼저 태조의 즉위교서를 짓는다. 새나라 운영방향이 나타나 있다. 자기의 생각을 구체화해서 <조선경국전>을 짓는다.
재상론宰相論 모든 정치는 재상에게서 나온다.
능력 있고 깨끗한 사람이 재상이 되어 정치를 해야 한다. 정치를 왕이 아닌 재상이 해야 한다.
정도전이 겪은 공민왕, 우왕, 창왕, 공양왕 이 중에 좋은 왕이 없었던 것이다. 왕은 어리석을 수도 있고 어릴 수도 있고 심지어 미치광이 일수도 있기에 그 피해는 백성이 떠안기에 권력을 재상에게 옮기고 왕은 존재하게 한다.
간관론諫官論 국왕의 옳지 못한 처사나 과오에 대해 간언諫言하는 관리로 정치에서 언론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언론이란 정치를 비판하는 것으로 정치가 부패하지 않게 할 수 있다. 강직한 사람이 간관이 되어야 한다. 젊은 관리는 강직한 간관이 되고 나이 든 재상은 능력 있고 깨끗한 사람이 되는 이런 사람들이 통치하는 나라를 그렸던 것이다.
"백성이 근본이 되고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하는 나라"
정도전은 왕자의 난 때 죽임을 당한다. 재상 중심의 정치론이 이방원의 불만을 사게 되고 이방원이 일으킨 난 때 죽임을 당한다. 정도전이 죽으면서 태조도 왕위에서 물러나게 된다. 정도전의 죽음은 새로운 실험이 실패했음을 뜻한다. 이 정치의 실패가 그 이후 100년 동안 조선왕실에서 왕들이 싸우게 된다.
정도전이 남긴 유산은
조선 그 자체이고, 정도전의 민본은 세종의 위민정치로 꽃 피우게 된다. 경국대전에는 재상과언관의 역할이 강조되어있다.
'군주가 민심을 잃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의 정도전의 질문에
정도전의 후손들은 두 차례의 반정으로 답변을 했다.
정도전은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도 정리한다.
"군주는 국가에 의존하고 국가는 백성에 의존한다 그러므로 백성은 국가의 근본인 동시에 군주의 하늘이다."
이 획기적인 사고가 다른 사람과 뛰어난 최초의 조선인임을 나타낸다.
조선 건국을 통해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백성의 생활은 개선이 되고 조선을 건국한 신진사대부들은 치자의 도리가 무엇인가 백성들을 위한 옳은 정치가 무엇인가 진지한 고민을 한다. 고려와 다른 나라 조선이 만들어진 것이다. 조선은 15세기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나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