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 / 2021. 11. 15. 14:39

박연朴堧(1378~1458) 편경, 전쟁나면 이것부터 숨겨라「대전통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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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朴堧(1378~1458) 

편경, 전쟁 나면 이것부터 숨겨라 「대전통편」

1636(인조 4년) 병자호란 

임금과 모든 신하, 백성이 피난길에 오르지만, 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장악원의 전악(음악감독)이다. '저 많은 악기를 어떻게 한단 말인가? 하나만 지켜내면 될 것이다. 그것을 우물 속에 숨겨라 ' 그것은 다름 아닌 불변의 악기, 편경이다.

 

고려 예종 11년(1116년)에 송나라에서 들여와 고려·조선 전시대에 걸쳐 종묘제례악, 연향 등 궁중음악 중 아악에 사용된 대표적인 악기이다.

편경을 망가뜨리는 자는 곤장 100대와 유배 3년에 처한다-경국대전

전쟁 나면 이것부터 숨겨라-대전통편

편경은 어떤 악기보다 귀하게 여겨 국보급 악기였다.  대표적 예악기禮樂器라는 상징 외에 편경을 더 중요하게 만든 비밀이 있는데,

 

첫째, 조선의 것으로 재탄생한다.

중국식 편경은 옥돌(경석)을 사용했지만 제각기 크기와 모양이 같거나 달랐고 옥돌은 당시 조선에서 희귀한 재료 었기에 흙을 구워 만든 외경을 대신 사용하니 음색은 물론 음정도 제대로 안 맞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1425년(세종 7년) 8월 "지금 경기 남양에서 나는 돌이 소리가 좋습니다 옥 다듬는 사람을 보내어 만들어 시험하기를 청합니다." 이에 세종은 음률가 박연 등에게 조선의 옥돌을 사용한 편경 제작을 명하고 1427년 조선만의 첫 편경이 탄생한다.  여러 시대의  경이 합쳐진 중국의 것은 과연 성음이 맞지 않았던 것이 지금 새로 만든 편경은 바른 소리를 얻었구나- 세종 15년

둘째, 돌로 만든 악기에 과학을 담다

위아래 총 16개의 경은 'ㄱ'자 형태로 동일한 크기에 오직 두께만 달리하여 제작 두께가 두꺼울수록 진동수가 높아 높은음을 낼 수 있기에 죄 저음 황종의 경 약 2.5cm, 최고음 청 협종의 경 두께 약 6cm, 서양 음계의 기본 도(C)에 해당하는 황종부터 한 옥타브 위의 레(D) 청 협종까지 모두 16개의 음계를 가진다

또한 현존하는  'ㄱ'자 기울기에서 가장 맑은 소리를 내는 115˚ 사용 등편경은 가장 단순한 구조에 소리의 과학을 입혀 만든 뛰어난 악기였다.

셋째, 조선의 표준음이 되다 돌로 만든 편경 다른 악기와 달리 온도와 습도의 영향을 받지 않아 음정·음색이 변함이 없는 음정 불변의 악기로 모든 국악기를 조율하는 기준이 된다. 이런 까닭에 전란으로 모든 악기가 파괴돼도 편경만 있으면 악기의 음복원이 가능하니 편경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 국보급 악기였다. 가장 간단한 재료로 만든 가장 정확한 음색이 악기 편경 

편경은 6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모든 아악의 표준음이 되고 있다

 

세종대왕은 과학, 경제, 국방, 예술, 문화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찬란한 업적을 남긴 조선조 최고의 성군이다. 백성과의 소통을 위해 훈민정음을 창제했고 백성과 더불어 즐기기 위해 많은 음악적 업적을 이루었다.

제위 초기에는 박연이라는 음악을 잘하는 신하와 함께 음의 기준을 위한 율관을 제작했고, 이를 바탕으로 합주할 때 음의 기준을 잡아 주는 편경과 편종을 만들었다. 그런데 박연이 편경을 제작한 이후 한음 한음 시연을 하는데 세종대왕이 맞지 않는 음이 있다고 지적을 했다. 그래서 박연이 확인을 해보니 실제로 경이 먹줄이 덜 갈린 채 남아 음이 맞지 않았던 것이다. 이 일화를 통해 세종대왕의 음악적 성과 뒤에는 탁월한 음악성이 뒤받침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세종대왕은 중국과는 다른 우리의 음악을 기록할 수 있는 기본법인 정간보를 만들고, 음악의 선율, 장고의 장·단, 박, 노래 가사 등을 함께 적어 넣어 여러 악기의 악보를 한꺼번에 보고 연주할 수 있는 매우 실용적인 기보이기도 하다. 세종대왕의 음악성은 새로운 음악을 작곡할 때도 발휘되는데 직접 박자를 짚어가며 하룻밤 사이에 오늘날 종묘제례악의 모태가 된 '정대업'과 '보태평'등을 창제하였다. 세종대왕이 만든 이 음악은 이후 세조 때 종묘제례악으로 채택되었고, 중요 무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어 지금도 매년 5월이면 종묘에서 들을 수 있다.

 

박연은 어릴 때부터 피리를 불며 음악에 심취한다. 비파, 거문고 등도 익혀서 매우 수준급으로 연주했다. 집현전 교리를 거쳐 사간원 정원, 사헌부 지평 등 출세가도인 청요직을 두루 섭렵한다. 세자 자리에 있던 세종의 세자시강원 문학직을 맡으면서 다시금 음악적 재능을 발휘할 길을 찾았다. 세종은 임금으로 즉위 한 뒤 관습도감 제조로 임명하여 음악에 전념하도록 하였다. 각종 국가 행사에서 연주하는 음악을 새롭게 정리할 필요를 느낀다. 편경 12매를 제작, 자작한 12 율관에 의거한 정확한 음률로 연주하게 했고 미비한 율관을 수정했다. 조정의 조회 때 사용하던 향학을 폐하고 아악의 사용을 건의하여 실행하게 하였다. 향악, 당악, 아악의 율조를 조사하고 악기 보법 및 악기의 그림을 실어 악서를 만들었다.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인수 부윤·중추원 부사를 역임한 후 예문관 대제학에까지 오른다. 1767년 영조 43년 문헌 공의 시호가 내려졌다. 고구려의 왕산악, 신라의 우륵과 함께 3대 악성으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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