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항의 시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바다로 가다
15세기 유럽은 동양의 비단과 향신료들 동방의 사치품이 아주 인기가 많았다. 유럽 기독교 국가 중 가장 동쪽에 있는 나라인 비잔티움 제국은 유럽과 동양의 중간에 있어 자연히 중계무역의 거점이 되었다. 동방의 물품들 중 가장 인기가 많았던 것은 비단과 각종 향신료들이었다. 이러한 물건들은 그 당시 유럽에서는 구하기가 힘든 물건들이었기 때문에 비잔티움 제국은 동방의 사치품들을 유럽에 공급하며 쏠쏠한 수입을 올리고 있었다. 비잔티움 서쪽에 있는 유럽 국가들은 대부분 비잔티움을 통해 동방의 물들 품을 공급받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1453년 이슬람 국가인 오스만의 침공으로 비잔티움 제국은 멸망하고 만다. 이슬람을 믿는 오스만 제국과 기독교를 믿는 유럽 국가들은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고 적대 관계였다. 당연히 오스만 제국과의 교역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스만 제국에 의해 동방으로 가는 길이 막혀 버린 것이다. 무역을 중시하던 포르투갈은 아프리카를 돌아가는 무역로를 개척하기로 한다. 포르투갈은 농사짓기에 적합하지 않은 땅이 많았기 때문에 상업을 중시했었는데 오스만 때문에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이다. 지중해 무역은 이탈리아가 꽉 잡고 있어서 더 이상 지중해에서는 이득을 볼 수 없었다. 그래서 아프리카를 돌아 동쪽으로 가다 보면 인도에 도착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한 인물은 포르투갈의 엔히크 왕자였다. 엔히크 왕자는 세계 최초로 해양학교를 세우고 북아프리카의 거점도시 세우타를 점령하는 등 아프리카 항로 개척에 기반을 닦는다.
이렇게 항로 개척에 한창인 포르투갈에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찾아온다. 지구가 둥글기 때문에 서쪽으로 가도 아시아를 만날 수 있고 포르투갈과 일본의 거리는 4,000km이고 인도까지는 거기서 조금만 더 가면 된다고 말하였다. 유럽에서 일본까지 15,000km나 적게 잡은 것이다. 당시 사람들이 듣기에도 콜럼버스의 계산은 황당했다. 지구는 둥글다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고 있었으나 콜럼버스가 말한 지구의 크기는 실제보다 1/4로 잘못 알고 있었다. 이때 포르투갈의 바르톨로메우 디아스가 아프리카 항해 중에 아프리카 끝부분인 희망봉을 발견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아프리카는 너무 넓었었기 때문에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아프리카를 넘어 인도로 갈 수 있다는 희망에서 희망봉이라 이름하였다.
콜럼버스는 포르투갈에서 지원을 얻는데 실패하고 만다. 콜럼버스는 여러 나라에 지원을 요청하러 다녔지만, 포르투갈은 아프리카에 관심 있었고 이탈리아는 지중해에만 관심이 있었다. 이제 콜럼버스는 스페인을 찾아가 요청하기로 한다. 스페인은 이제 막 아라곤 왕국과 카스가 티아 왕국이 합쳐져 연합왕국이 탄생한 직후였다. 스페인의 이사벨 여왕은 포르투갈이 희망봉을 발견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조금은 불안했는지 콜럼버스를 지원해 주기로 한다.
1492년 8월 2일 드디어 인도를 향한 역사적인 항해가 시작되었다. 콜럼버스는 120명의 선원을 태우고 스페인의 팔로스항을 출발한다. 그는 그 내용을 '항해일지'에 기록했는데 항해를 시작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선원들은 불안과 두려움에 떨기 시작했다. 그는 선원을 격려하고 다독였지만 항해일지에 미지의 지역으로 향하는 장기간의 여행이 그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고 콜럼버스의 설명은 그들의 근심을 부분적으로밖에 해소시켜주지 못한다 라고 기술했다. 콜럼버스는 10월 12일 우여곡절 끝에 결국 현재의 바하마 제도인 살 살바도르 섬에 도착한다.
콜럼버스는 자신이 도착한 곳이 인도라고 착각했고, 콜럼버스의 착각은 그가 죽을 때까지 이어졌다. 그 이후 이탈리아의 '아메리고 베스푸치'도 아메리카에 상륙하게 된다. 그는 콜럼버스의 2차 항해에 동참한 것을 시작으로 1499년부터 1502년까지 남아메리카의 대서양 연안을 구석구석 탐험한다. 시간적으로 콜럼버스보다 늦게 탐험했지만, 그곳이 인도가 아니라 전혀 다른 대륙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신대륙을 발견한 최초의 인물이라고 생각한 지도제작자 '발트 제뮐러'가 1507년에 세계지도를 제작할 때 아메리고의 이름을 적어놓았고 이때부터 이 대륙이 '아메리카'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아메리카 대륙이 발견된 15세기 유럽은 큰 혼돈의 시기였다. 십자군 전쟁이 끝난 후 교황의 권위는 땅바닥으로 추락했고 흑사병이 대륙을 휩쓸고 간 탓에 봉건영주들은 쇠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반면 국왕의 권력은 막강해졌다. 중앙집권적 통치 형태가 갖춰지면서 근대적인 영토 국가의 모습이 만들어지고 있었는데 이럴수록 유럽 각국에서는 영토와 관련된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그런 과정 중 각 국가들은 자국의 승리를 위해서는 힘을 길러야 한다는 사실과 그것을 위해 경제적 기반이 우선 갖춰져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또한 농업이 전문화되면서 상업적인 형태의 농업이 발달하고 도시를 기반으로 상업이 발달하면서 초기 자본주의가 등장한다. 시간이 갈수록 자본가들이 세력을 확장했고 부에 대한 욕구는 눈덩이처럼 커져갔다.
이런 상황에서 마르코폴로의 '세계의 기술'이란 책이 유럽인들을 사로잡았다. 이탈리아 출신의 마르코폴로가 동방무역을 하던 아버지를 따라 중국 원나라로 갔다가 17년 동안 중국을 여행하면서 쓴 기행문이다. 이 책에는 신비로운 동양에 대한 이야기가 가득했다. 이 책은 읽은 이들은 동방에 대한 환상을 가지게 되었고 이를 위해서는 오스만을 피해 새로운 항로를 개척할 필요성이 있었다.
이때 사방에서 원주민들이 튀어나왔고 불을 내뿜는 총을 보자 그들은 곧바로 엎드려 경의를 표했다. 원주민들은 이 이방인들이 하늘에서 내려온 사자라고 생각했다. 콜럼버스 일행은 원주민보다 더 환호한다. 원주민들이 금으로 만든 장신구들을 주렁주렁 달고 있었기 때문이다. 콜럼버스는 원주민들을 약탈하고 온갖 금은보화와 유물을 빼앗아 1493년 3월에 스페인으로 귀환한다. 그들은 아메리카에서 가져온 금과 노예로 데려온 원주민들을 마치전 시회처럼 사람들에게 선보인다. 사람들은 콜 럼버 암스를 개선장군처럼 환대했고 신대륙으로 가면 부자가 될 수 있다는 기대감에 부풀었다.
이에 너도나도 콜럼버스의 2차 항해에 동참하기 위해 나서기 시작한다. 2차 항해는 무려 17척의 선박에 15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여했고 아메리카 대륙으로 다시 출발했다. 콜럼버스는 원주민들을 존중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자신들의 노예, 혹은 이미 지배하에 있는 물건 정도로 생각했고 실제로 명령에 따르지 않는 원주민들을 고문하고 학대하고 죽였다. 콜럼버스가 얻은 금은보화는 예상보다 훨씬 적었고 게다가 약속한 향신료는 얻지 못했다. 돌아온 콜럼버스에게 싸늘한 시선과 비난이 몰아쳤고 그에 무능함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는 이후로도 몇 번의 항해를 더 거치며 중앙아메리카 파나마를 발견하기도 했지만 귀족들과의 불화 때문에 별다른 진척 없이 세상을 떠나고 만다.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은 유럽뿐만 아니라 세계사 전체적으로 굉장히 중요하다. 무역의 중심지가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이동하게 된 것이 가장 중요하다 고 할 수 있다. 새로운 항로의 발견으로 동방과 직접 무역을 할 수 있게 되었고 값비싼 수수료를 내지 않게 되었다. 또한 지중해를 중심으로 무역하던 도시들이 몰락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또 아메리카 대륙에서 담배와 감자, 옥수수, 토마토, 고무, 땅콩, 카카오처럼 중요한 작물들이 들어오는가 하면 유럽의 식량부족 문제를 상당 부분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수많은 유럽인들이 새로운 삶을 꿈꾸며 대거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하는 등, 그들에게 신대륙은 기회의 땅이 었던 것이다. 특히 영국인들은 북아메리카로 집중적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는데 1700년대 초반에는 30만 명이 넘었다고 기록되어있다.
이 아메리카대륙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미 존재하고 독자적인 문명이 있었다. 콜럼버스보다 앞선 노르웨이의 레이프 에릭손이 서기 1000년 전에 아메리카에 도착했다는 기록이 있다. 콜럼버스의 발견은 유럽 대륙과 아메리카 대륙이 소통하게 됨으로써 상상 이상으로 물질적 이득을 얻어낼 수 있었던 사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