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 / / 2022. 12. 30. 09:50

표트르 1세(1672. 5. 30 ~ 1725.1. 28)

반응형

표트르는 1672년 5월 30일 차르 알렉세이와

그의 두 번째 부인 나탈리야 나리시키나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차르 알렉세이는 슬하에 모두

16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표트르 1세는 다섯 명의 아들 중 막내였다.

 

4살 되던 해인 1676년 차르 알렉세이가 

사망하자 아들 중 제일 연장자인 

표도르 3세가 차르에 등극했다. 

이복형제 표도르의 즉위로 인해 

표트르의 모친 나탈리야 키릴로브나와 

외가인 나리시킨 가문은 

권력에서 배제되었다.

 표트르 모자의 거처도 크렘린에서 

모스크바 근교 

프레오브라젠스크로 옮겨졌다.


표트르가 어린 시절을 보낸 

프레오브라젠스크는 

외국인 집단거주지인 

독일인촌과 인접해 있었다. 

이들의 생활에 호기심을 가졌던 표트르는 

자주 독일인촌을 방문하여 

외국인들과 교류했다. 

당시 충분한 교육을 받지 못했던 표트르는 

이런 체험을 통해 서구의 

선진 문화를 배울 수 있었다. 

또한 이 시기의 표트르는 또래 아이들을 

모아 전쟁놀이에도 열중했는데 

이것은 이후 프레오브라젠스키, 

세묘놉스키 근위대 탄생의 단초가 되었다. 

이러한 유년기의 경험은 표트르가 

독자적인 통치를 시작하며 서구를 모델로 한 

근대화 정책과 군비 강화를 통한 

해외 확장 정책을 추진하게 

된 배경이 되었다.

1682년 병약했던 표도르 3세가

 후사없이 21살의 나이로 사망했다. 

왕위계승을 놓고 불거진 정치적 혼란은 

유혈 사태를 겪으며 이복형제인

 이반(이반 5세)과 표트르(표트르 1세)가 공동차르에 

등극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이반 5세는 영민하지 못했고 

표트르 1세는 10살에 불과했기 때문에

 1689년까지 실질적인 권력은 

섭정으로서 누이인 소피야가 행사했다.

1689년 성장한 표트르 1세는 

모친인 나탈리야 나리시키나와 

외척들의 지원 속에 소피야와의 권력투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실질적인 최고통치자가 되었다.

 1694년 모친이 사망하자 

표트르 1세는 본격적으로 

독자적인 통치에 나섰다.


표트르 1세는 선진 문물을 직접

체험하기 위해 250명으로 구성된 사절단을

이끌고 1697년 3월 유럽으로 출발했다.

사절단은 리가, 쾨니스버그, 브란덴부르크,

네덜란드, 영국, 오스트리아를 방문했다.

 

표트르 1세는 다른 무엇보다 서구의

기술적 성취에 관심을 쏟았다.

그는 수백 명의 선박건조 전문가를 채용했고,

무기와 기타 선진 설비들을 구입했다.
15개월간의 해외 체류에서 귀환한 후

 표트르 1세의 개혁 정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는 통치 체제에서부터 

일상의 삶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폭넓은 개혁을 시행했다. 

개혁의 궁극적인 목표는 서구식 근대화를 통한 

강력한 국가 건설이었다.

 

 표트르는 칙령을 공포하여 독일식 의복을

 착용하고 수염을 자르도록 했다.

 또한 역법과 신년의 기준을 개정했다. 

이에 따라 기존 러시아-비잔틴력 7208년은

 율리우스력으로 1700년이 되었다. 


특히 군사력 강화에 역점을 두었던 

표트르 1세는 함대를 창설했고, 

서구를 모델로 군의 편제와 

훈련 방식을 개편했다. 

군제 개혁은 무엇보다도 전쟁 수행을

 위한 필요 때문이었다. 

더불어 군수물자의 조달을 위해 산업과 

무역 발전 정책들이 시행되었다.
표트르는 기존의 통치 체제를 개편하여 

차르 중심의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확립하고자 했다. 

최고행정기관으로 원로원을 신설하고 

중앙과 지방의 행정기구를 

효율적으로 재편했다. 

이에 따라 1700년부터 각종 전문기술학교,

군사학교, 종교학교가 설립되었다.

1714년 칙령으로 전국에 걸쳐 설립된

산수학교는 초등교육 기관으로 러시아어와

산수, 기하학을 무상으로 가르쳤다.

 

1724년에는 최고학술기관인

러시아제국학술원 창립이 결정되어

그의 사후인 1725년에 개원했다.
언론 출판에도 관심을 기울였던

표트르 1세가 설립한 인쇄소들은

1700년부터 25년 동안 1,312종의

도서를 발간했다.

 

1702년 표트르 1세가 창간한 러시아 최초의

인쇄신문 ‘베도모스티’는 1728년까지 발행되었다.

세속적인 언론 출판의 발전과 맞물려

러시아어에서도 변화가 나타났다.

효율적인 인쇄 작업을 위해 1708년

시민 자모(알파벳)가 채택되었고,

서구 언어에서 차용한 4,500여 개의

단어가 새롭게 만들어졌다.

표트르는 외국 화가들을 러시아로 

초빙했으며 동시에 재능 있는 젊은이들을

 외국으로 유학을 보냈다. 

이들 유학생들은 1730년대를 전후하여

 새로운 예술적 경험과 전문적 기량을 

가지고 러시아로 귀환했다.

1713년 제국의 새로운 수도가 된

 상트페테르부르크 건설은 

특별한 의미를 지녔다. 

도시건설에 외국 건축가들이 참여했고 

차르가 구상한 계획에 따라 실현되었다. 

 건축양식, 실내외장식 등과 함께 의식주, 

여가활동을 포함한 일상생활의

 모습도 변화되었다. 

 

대표적인 예로 1718년 특별칙령에

 따라 사교 모임인 야회가 시행되었다. 

러시아에서 이것은 새로운 사교의 장이었다. 

야회에서 귀족들은 이전의 연회와

 달리 함께 춤추고 즐기며 

자유롭게 교유했다.


표트르 1세는 러시아 사회에서

여성들과 이민족의 지위 개선에도 고심했다.

그는 특별칙령들을 통해 부모의 강압에

의한 강제 결혼을 금지했다.

또한 1696년 ~ 1704년 공포된

공공 축제에 대한 법령은 여성을 포함한

모든 러시아 신민이 축제에 참여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

사회 전반에 걸친 다양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지배-피지배의 계급 구조는

 견고히 유지되었다. 

1714년 공포된 칙령을 통해 귀족의

 법적 지위를 공고히 하는 한편, 

토지 소유 형태에 대한 

법적 통합을 규정했다.

 표트르 통치기 때부터 

농민 계층은 사유지 농노, 교회 농노, 

국가(국유지) 농노로 분리되었다. 

이 세 부류의 농민들은

 납세자 명부에 등록되어 

인두세가 부과되었다.

전반적으로 표트르 1세의 개혁은 

국력 강화와 서구 문화 전파를 지향했으며, 

동시에 절대주의 체제 확립에 초점이 맞춰졌다. 

개혁 과정에서 러시아 사회 전반의 후진성이 

개선되었으며 귀족 계층을 중심으로 

점차 새로운 가치 체계, 세계 인식, 

미적 개념이 조성되었다.

표트르 1세는 오스만 제국,

스웨덴과의 전쟁을 통해 영토를 확장했다.

1695년 봄, 표트르 1세의 아조프 원정으로

시작된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은

1696년 7월 19일 아조프 요새를 점령함으로써

러시아의 승리로 끝이 났다.

1700년 6월 러시아는 오스만 제국과

평화조약을 체결하고, 아조프 해 연안 지역에

대한 러시아의 권리를 확보했다.

이로써 러시아는 해양으로의 남쪽 출구를

획득하게 되었고, 남부 국경 지대의

안보가 강화되었다.

1700년 8월 러시아의 선전포고로

 시작되어 20년 동안 지속된 스웨덴과의

 북방 전쟁은 1721년 8월 30일 

니시타트 평화조약의 체결로 종결되었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러시아는 인그리야, 

카렐리야 일부, 에스트랸디야, 리플랸디야 지역 등

 러시아 북부와 발트 해 연안지역을 

병합함으로써 발트 해로의 전략적 출구를

 확보하고 북방으로 영토를 확장했다.

이들 전쟁에서의 승리로 러시아는 

유럽의 강국으로 부상했다. 

원로원은 표트르 1세에게 국부, 황제, 

대제의 존칭을 바쳤으며, 

1721년 10월 22일 표트르는 

러시아 최초의 황제로 추대되었다. 

이로써 러시아 제국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표트르 1세는 모친의 요청에 못 이겨

열일곱 살이던 1689년에

옙도키야 로푸히나와 결혼했다.

이들 사이에 결혼 1년 후

아들 알렉세이가 태어났다.

이후에 태어난 알렉산드르와

파벨은 출생 후 곧 사망했다.

어린 나이에 원하지 않은 결혼으로 

인해 표트르 1세는 왕후 옙도키야에

 대해 무심했고 결혼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그런 와중에 옙도키야는 

아들 알렉세이의 반란 음모에 연루되어

 1698년 수도원으로 유폐되었다. 

고난의 시간을 견뎌낸 비운의 왕후는

 손자 표트르(알렉세이의 아들, 표트르 2세)가 

제위에 오르는 것을 지켜본 후

 1731년 사망했다.


공식적인 후계자로서 황태자 알렉세이는

여러 가지 문제로 표트르 1세와

갈등관계에 있었다.

그는 특히 표트르의 개혁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1716년 알렉세이는 빈으로 도피했고,

동서인 카를 6세는 알렉세이가 생활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1718년 6월 24일 127명으로 

구성된 최고법정은 국가전복의 죄목으로

 알렉세이에게 사형을 언도했다. 

알렉세이는 사형이 집행되기 전 

1718년 6월 26일 페트로파블롭스키

 요새 감옥에서 사망했다. 

사망 원인은 정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알렉세이는 슬하에 아들 표트르와 

딸 나탈리야를 두었는데, 

이후 표트르는 1727년

 황제 표트르 2세로 등극했다.


표트르 1세는 통치 말기에

중병을 앓게 되었다(요독증을 동반한

신장결석이었다고 추정된다).

1724년 여름 그의 병은 더 위중해졌고,

증상이 악화되었음에도

표트르는 국사에 몰두했다.

1725년 1월 28일 6시 표트르 1세는

 후계자를 지명하지 못한 채 

겨울궁전(에르미타지)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의 시신은 상트페테르부르크

 페트로파블롭스키 

요새 사원에 안장되었다. 

서구화 개혁 정책을 통해 

러시아의 근대화를 이끌었고,

 지속적인 대외 확장 정책으로 

제국을 건설한 표트르 1세는 

러시아 역사에서 대제로 

기억되고 있다.

반응형

'세계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메이지 유신  (0) 2023.01.18
미국독립전쟁 과정  (0) 2022.12.29
미국독립전쟁(1775~1783) 원인  (0) 2022.12.28
아편전쟁  (0) 2022.12.27
갑골문자  (0) 2022.12.26
  • 네이버 블로그 공유
  • 네이버 밴드 공유
  • 페이스북 공유
  • 카카오스토리 공유